예술의 우주/리뷰

다색 빗물의 파동 - 김영민 개인전

지하련 2009. 2. 3. 20:56



다색 빗물의 파동 - 김영민 개인전
2009. 1. 29 - 2009. 2. 20 
굿모닝신한갤러리(여의도) 
 


Untitled, 130.3X162.2cm, Mixed media on Canvas, 2008


얼마나 한참 앉아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비포장 길 한 쪽 구석, 오전에 내린 비로 얕고 작은 웅덩이 하나가 생겼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앉아, 바지 끝이 닿는지도, 소매 끝이 더러워지는 지도 모른 채, 맑게 갠 하늘이 빗물 웅덩이의 수면 위로 비친 모습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바람이 부면 그 작은 웅덩이에도 물결이 일었다. 바로 옆 미루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에 요동을 쳤고 내 작은 손가락 하나에도 흔들거렸다. 약간 떨렸고 약간 안타까웠다. 어린 아이의 마음속에서, 그 작은 웅덩이에 생긴 자그마한 변화가 그, 혹은 그녀에게 갑자기 생긴 상처처럼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캔버스 가득 흔들거리는 물 표면의 흔적이 가득했다. 작은 연못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만드는 일련의 운동들, 파동들, 상처들이 보였다. 나는 김영민의 작품을 보면서 어렸을 적 기억의 사소한, 그리고 아련하기만 한 순간을 끄집어 올렸다.

Untitled, Digital print on OHP Film, 2008


작가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물 표면의 한 순간을 캔버스에 옮겨놓는다. 그는 현대의 거대한  도시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들과 그 빗줄기들이 만나게 될 지상의 어느 물 표면들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정해진 동선을 그리며 이루어지듯, 작가가 사용하는 색들도 일정한 변화의 영역 안에서, 아슬아슬한 농도와 터치로 자신들의 존재를 견디는 듯 보이고, 무한히 이어질 듯 느껴지는 파동들은 연약한 색채들 속에서 흐려지고 뒷걸음질 치며, 캔버스의 여백 속으로 사라진다.

Untitled, 162.2X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08


실은 이 세상에 정지해 있는 것이란 없다. 김영민의 작품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운동의 정지된 한 순간을 잡아내고 있지만, 실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다. 꼭 엘레아의 제논이 말한 ‘나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에 대해 베르그송이 지적하듯, 우리는 시간을, 운동을, 우리의 삶을 공간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회화들이 한 곳에 집중하면서도 화면의 전체 공간 자체를 열어두듯, 김영민의 작품들도 반복된 파동들의 겹침, 흐릿하지만 특정 범위 안에서의 변화되는 색채들, 그리고 완결성을 거부하는 선과 터치를 통해, 정지란 없고 오직 운동만 있음을 표현해낸다. 마치 우리의 생이, 우리의 영혼이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은 채, 어딘가를 향해 있듯 말이다. 하지만 정처 없이 운동하는 것은 아닐까. 계속 저렇게 물결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술이, 우리 삶이, 내 영혼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게오르그 짐멜이 로댕의 작품을 보면서, 심리학을 추구했다고 말하듯이, 김영민의 작품들도 본질적으로 심리학주의를 향하고 있다. 게오르그 짐멜은 ‘로댕의 예술과 조각에서의 운동모티브’라는 글 속에서 근대의 심리학주의는 내면적 세계의 반응에 입각해, 세계를 체험하고 해석해내며, 영혼의 끊임없이 변하는 요소들을 통해 확고부동한 내용을 해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모든 실체가 정화되며, 따라서 운동의 형식을 띠게 된다고 지적한다.

Untitled,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07


이와 비슷하게 김영민의 작품들 속에서 파악되는 운동의 형식(파동)은 바라보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비추고 있다. 내가 그의 작품을 보면서,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듯이 김영민의 작품들은 캔버스에 표현된 색채의 파동들 속을 지나, 우리 마음의 창, 기억의 입구, 추억의 향기가 된다. 그래서 운동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은 시간에 대한 은유이며, 갈 수 없지만, 변하지도 않는 과거의 어떤 순간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이미 사라져버린 것, 가지 못하는 곳, 아련한 어떤 것들에 대해 작가는 작은 원형의 물결들로 표현해 낸다. 하지만 이를 과거 지향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현재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운동은 정지될 수 없는 것이며,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지속적’이라는 형용어는 김영민의 작업을 특징짓는 한 단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Untitled, Digital print on OHP Fil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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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전시가 열리는 굿모닝신한갤러리는 여의도 신한증권 건물 1층에 위치해 있습니다.(5호선 여의도역에서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