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안드로메다같은 일상의 연속

지하련 2009. 4. 30. 13:54




매우 피곤한 날들이 있었다. 마치 내 일상이 늦가을 낙엽처럼 사소한 바람에도 흔들려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져 무심히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에 으깨지는 듯한 느낌의 날들이 있었다. 종일 사무실에서 이슈들이 난무하는 회의에, 까다로운 문서 작성에, 고객이나 대행사와의 전화에 시달리다가, 저녁에는 바짝 긴장해서 만나야만 하는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에, 도수가 높은 술 한 잔에, 이어지는 2차에, ... ... 이런 날이 하루 이틀 연속되면, 피로와 스트레스에 지쳐 거실 불을 켜놓은 채,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다. 책들로 어지러진 서재는 이미 책들을 수용할 자신의 역량을 한참을 벗어나, 거실에까지 책들이 어지렇게 널린 어느 빌라 4층, 오랜 독신 생활의 사내가 그렇게 잠에 들었다. 프로이트의 견해대로라면, 나는 분명 꿈 속에서 내 쓸쓸함을 치유하고 아침으로 돌아올 터였다. 하지만 행복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꿈은 도통 기억이 나지 않고 이부자리를 펴지도 않은 채 딱딱한 방바닥에 그대로 잠을 자다가 허리 근육통을 불러들였다.

작년 위경련으로 근육 진통제를 먹은 후, 채 1년도 되지 않은채 근육 진통제를 먹었다. 딱딱하고 잘 부서지는 약의 느낌은 마치 내 인생같았다. 약의 효능만 제외한다면, 손톱만한 약 같이, 나는 속이 텅 빈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일주일 넘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다가 덜컥 감기에 걸렸다.

코감기였다. 그것도 지독한 코감기. 약국에 가서 종합 감기약을 사흘치나 지어 먹었다. 집은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이젠 집마저도 집 주인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었다. 서로 닮아가는 게 이 세상 이치라지만, 쓸쓸한 인간을 닮아, 공간마저 쓸쓸함을 풍기는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도 없다. 이젠 그 누구도 내가 사는 공간으로 초청하지 못하리라. 서재의, 거실의, 안 방의 휴지통은 코 푼 휴지들로 넘쳐났고 지하철에서, 사무실에서 나는 코를 푸느라 제 정신이 아니었다. 지독한 두통까지 생겼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머리 속 통증과 함께 인식되고 해석되었다.

그런데 왜 아플 때마다 저녁 약속은 많이 잡히는 것인지. 일상의 피곤은 긴장과 스트레스, 적당량의 알콜과 함께 육체적 고통, 혹은 아픔과 뒤범벅이 되었다. 금붕어는 지쳐가는 물 속에서 자신들의 배설물 사이를 유영했고, 우편함은 고지서로 넘쳐났다. 가끔은 독촉고지서가 오기도 했다. 먼지들이 쌓였고 원두 커피 가루들이 여기저기 날렸다. 따스하고 화사한 봄은 왔지만, 공항 근처, 어느 빌라 4층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빌라 계단에서 서성거리거나 창 밖으로 인기척을 낼 뿐이었다.

이렇게 한 3~4주를 아픈 몸을 이끌고 일상을 보냈더니, 일상의 리듬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지나 안드로메다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행의 안드로메다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지, 아니면 초등학교를 다니기도 전이었는지, 나는 일본 만화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우주 비행기 만드는 물리학자가 되어서 안드로메다 은하로 여행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곤 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 그런 터무니없는 꿈 따윈 꾸지 않지만, 내가 소망하는 몇 가지 것들은 도리어 너무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라, 더 어렵게 여겨지는 건 왜일까. 이제 겨우 몸은 정상 상태로 돌아오고 있었고 업무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있지만, 이번 주 끝에 마주한 긴 연휴는 마치 욕망으로 넘쳐나는 시간들의 쓸쓸한 블랙홀처럼 느껴진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읽던 책 표지를 쳐다본다. 잭 런던, '강철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