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Monsieur Hire

지하련 2004. 11. 26. 18:33


Patrice Leconte 감독을 한동안 좋아했다. 꽤 오래 전 이야기다. 그 땐 '열혈'까지는 아니었어도 숨겨진 영화를 찾아보았고 본 영화들마다 감상평을 정리해 두었다. 정성일의 팬까지는 아니었어도 그의 몇몇 글들은 좋아했다.

창 밖으로 한 쪽으로는 파란 하늘이 보이고 한 쪽으로는 무거운 먹구름이 몰려있는 풍경을 보면서 이르 씨를 떠올렸다. 무뚝뚝하고 웃는 법이라곤 없는 외톨이 남자. 그리고 그는 영화 마지막에 바보같은 반전을 일으키며 사랑이 무엇이고 증오가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아파트에서 떨어진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 한 여자와 한 남자. 한 여자는 자신의 아파트에 있고 한 남자는 경찰에 쫓겨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아파트 아래 떨어지면서 서로 눈빛이 마주친다. 이 순간.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다.

눈이 흩뿌리다가 어느 새 늦가을, 혹은 초겨울 바람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오늘 문득 이르씨가 떠올랐다. 그의 철부지 같은 사랑과 그의 죽음을. 그리고 철부지같은 한 여자를 떠올린다.

참 잔인한 영화이다.



2046에서 남자 주인공은 한 여인의 사랑을 거부한다. 왜냐면 그녀가 자신을 버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의 행동을 보면서, 사랑할 수 없는 남자의 비극을 떠올렸다. 그에겐 사랑을 이룬 경험보다 실패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언제나 그 실패에 대한 보상만을 기대한다. 그 자신만 그 자신의 과거를 알기 때문에, 그만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다들 과거에 얽매여 있으며 영화 자체도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에 얽매여 있었다. (드디어 왕가위의 독백이 시작되는 건가.)

하지만 이르씨는 과거가 없었기 때문에 한 여자의 눈빛과 손길이 거짓인 줄도 알면서 앞을 향해 내달린다. 이르씨는 처음부터 버림받기를 각오한 셈일까. 아니면 과거가 없다는 이유로 너무 희망적이었던 걸까.

희망. 참 좋은 단어이지만, 너무 싫고 증오스러우며 언제가는 사전에서, 모든 언어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은 단어이기도 한다. 희망. 글쎄. 그게 어디 있는 걸까. 하긴. 술 속에는 있긴 하다.

오래된 턴테이블 위에 마크알몬드의 레코드를 올려놓았다. 한 7년 전 쯤에 황학동에서 만오천원 주고 산 중고 수입 LP다. 마크알몬드. 이런 날에 딱 어울리는 친구들이다.

오늘 밤 술을 마시고 있을 때, 하얗게 절망처럼, 혹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희망처럼 눈이 흩날릴 거다. 그리고 지쳐버린 인생들 위로 하얗게 꽃이 피어날 것이다. 난 그 꽃 위로 나는 겨울 나비가 될 것이다.

혹시 오늘 밤길에 나비를 보게 된다면, 당신은 나를 만난 것이다. 겨울 나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