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슬픈 노란색

지하련 2009. 5. 30. 16:13


짙은 갈색의 원두커피의 깊고 거친 맛이 입 안 가득했다. 때이른 더위에 사무실 에어콘은 긴 소음을 내며 운전하고, 5월말 어느 오후는 나른하기만 했다. 하지만 나른한 몸과 마음은 남쪽 마을의 어느 새 이름을 딴 바위로 향했다.

일상의 바쁜 일들이 끝나면, 부산, 김해, 진해, 광주, 해남을 거쳐가는 여행이나 떠나야 겠다. 그 때쯤 되면 세상은 조용해져 있겠지. 아마 그 때쯤 되면, 오늘 일은 조금은 잊혀져 있을 것이고 정부와 언론들은 연신 '북핵'과 '경제'만을 외쳐되고 있겠지. 

아마 알튀세르의 말처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의해
'호명'당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주류라고 믿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비주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비주류임을 자각하고 있는 비주류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적대적인 비난은 전체 인구의 몇 %도 채 되지 않는 주류의 호명에 힘입은 비주류에 의해서 자행될 것이다. 즉 우리의 적은 우리다. 

인터넷을 뒤져,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들을 보았다. 오늘 서울 시내를 가득 채운 노란색들과 가장 비슷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너무 슬픈 노란색이다. 아마 이렇게 슬픈 노란색들이 모인 풍경을 내가 죽을 때까지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마크 로스코는 색들 사이를 방황하다 우울해졌고 결국 자살했다.


밤에 몇 분과 함께 작지만 소란스런 논쟁을 오갔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였다. 그러자 정말 많은 말들이 오갔다. 그 사이에서 나는 또다시 깊이 절망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계급적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단지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정보가 있었다는 것이며, 그 정보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는 언어들이 주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http://intempus.tistory.com/1052)

그러나 놀랍게도 현 정부에 대한 것은 없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정치화하라.

마크 로스코의 저 작품들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을까. 아마 정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경멸당할 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정치적인 여건과 이유들로 인해 죽음을 택했지만, 종종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딘가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

말 없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오늘 따라 우울하고 슬프게 보이는 건, 이미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오직 해석만 분분하기 때문이다. 오직 깊은 슬픔을 가진 노란색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