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안경

지하련 2009. 7. 17. 12:09


어렸을 때, 안경을 끼고 있던 친구들이 부러웠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 눈이 나빠졌다는 듯이, 그들 대부분은 반장이거나 부반장이었다. 안경과 은밀한 비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뭔가 있어보인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억지로 눈을 나쁘게 만들기로 했다. 내 최초의, 자기 파괴적인 경향의 나쁜 마음이었다. 초등학교 때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다행스럽게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사오년이 지난 후, 나는 결국 안경을 쓰게 되었다. 깨알 같은 글자의 소설책들(세로쓰기로 된 책들까지)과 음란한 영상을 보여주는 심야의 유선 방송 탓이였다.


안경, 내 몸의 연장

늘 몸에 붙어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익숙해져버린 낯선 물체. 내 두 눈이 외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동안엔 언제나 눈 앞에 앉아 외부 세계를 확실하게 보여주게 해주는 존재. 옷은 벗은 상태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안경을 벗은 상태에선 글을 쓸 순 있으나, 책은 겨우겨우 읽을 수 밖에 없는. 꽤나 곤란한 내 일상의 파트너.

내구성이 약한, 마치 감정의 연약함처럼.

따지고 보면, 안경을 집어 던진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슬픔의 아침 샤워 때, 욕실 타일 바닥 위로 사뿐히 떨어진 안경이 깨진 경우는 여러 번.

나는 욕을 했다. 떨어져 깨진 안경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욕실을 걸어나와, 집 곳곳에 물기를 흩뿌리며,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깨진 안경알 조각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내 마음도 함께 버리며, 욕실 바닥과 함께 다시 샤워를 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슬픔이 지나갔다.

소설가의 안경.

몇 년 전 쓰다만 소설을 다시 꺼내보지만, 엄두가 나질 않는다. 늘 어떤 이야기, 어떤 인물, 어떤 상처 앞에선 무섭고 두렵다. 문장이 어렵고 단어가 힘들다. 근사한 안경 이미지를 찾다가 발견한 헤르만 헤세의 안경. 나도 저런 동그란 안경을 쓰고 싶은데, 동그란 안경테를 파는 안경점이 의외로 없다는 것.

어둡고 깊은 복도를 가진 도서관에서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던 18살의 봄이 기억난다. 쓸쓸하던 사춘기 끝자락의 봄에, 나는 헤르만 헤세를 읽었다.

- 헤르만 헤세의 안경 -
출처: www.zocalopublicsquar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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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온다. 점심 식사를 하고 비를 맞으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안경에 빗방울들이 묻었다. 옷이 젖었다. 외장 하드디스크에서 몇 장의 사진을 보았다. 적당히 쓸쓸한 여름이다.

남부 독일의 어느 마을 옆

남부 독일의 어느 호텔 창. 밤새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