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기억의 정치, 권귀숙

지하련 2009. 8. 17. 12:52

기억의 정치 - 10점
권귀숙 지음/문학과지성사


현재 진행형이다. 아마 그렇게 '현재 진행형'으로 있다가 묻혀질 것이다. 현대 한국 내에서 끊임없이 권력에 의해 자행되어 온 대량학살이 이야기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하긴 대량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 것도 채 100년이 되지 않으니(일제, 광복 후 미군정,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와 군사정권들에 이르기까지), 젊은 세대로 속하는 우리들에게 대량학살은 아주 먼 이야기일 뿐이다. 직간접적으로 강요된 침묵 속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은 아주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기억'을 수집하고 분석하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이젠 증언을 할 사람들마저 불합리했던 과거 속으로 사라져갈 때, 슬프고 고통스런 과거이지만,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처럼 여겨진다. 

4.3 사건, 너무나도 끔찍했던 이 사건은 그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이 사건은 오직 먼 소문과 깊은 침묵으로만 전해져 왔다. .


권귀숙이 이 책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기억들을 모으고 분석하며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묻고 있다. 책은 얇고 깊이 있는 분석보다는 마치 기억을 통해 현재적 의미를 묻기 시작하는 도입부로 읽혔다.


기억은 한 개의 고유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적 기억'도 사회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기억의 사회성을 처음 지적한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한 사회에서 '무엇이 기억할 만한 것'이며 어떻게 그것이 기억되는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집합기억 collective memory'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이는 한 집단의 성원들이 서로 공유하는 기억을 의미한다. (중략)
여기에서 개인적 기억의 사회화 과정과 집합기억의 개별화 과정에 보다 관심을 둔 '사회적 기억'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집합기억을 한 "사회의 기억 memory of society"로 본다면 사회적 기억은 "사회 내의 기억 memory in society"이다. 즉 사회적 기억이란 기억이 형성되는 사회적 과정으로 기억이 실천되는 장이라 볼 수 있다. 기억들이 형성되고 여러 기억들이 갈등하며 혼재하는 기억들의 장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기억은 다중적이고 일시적이고 컨텍스트적인 성격을 띤다. (35쪽)


그런데 이런 도입부가 필요한 대량학살이 현대 한국에서 다수였다는 사실은 너무 가슴 아프고 슬프기만 하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늘 후대의 몫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남겨진 기억들의 분석을 통해 저자는 그 때 그 일을 보듬고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