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하련 2009. 8. 29. 19:25

 

소설가의 각오 - 8점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문학동네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지음), 김난주(옮김), 문학동네 




소설가 중에 그럴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나 그렇다고 믿고 있는 자는 많아도, 세상에 있는 많은 불행을 혼자 짊어질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큰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딱히 없어도 상관은 없다. 소설은 소설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또 소설가가 책을 선전하는 이외의 목적으로 자기 작품 앞으로 나설 때에는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아니면 단호하게 소설가이기를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36쪽)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207쪽)


내가 이 오래된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된 이유는, 어느 잡지를 보다가 '하루키와 달리기'에 대한 짧은 글을 읽고 흥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한다. 하지만 하루키를 대단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찌 되었건, 하루키 팬으로 보이는 글쓴이가 마치 달리기를 소설의 원천 쯤으로 파악하는 것에 기분이 다소 상했던 터에, 마루야마 겐지의 달리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 터전을 잡고 사는 마루야마 겐지, 그는 시골길을 자신의 셰퍼드와 함께 달렸다. 소설 쓰기란 육체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믿는 그. 그런데 내 기억에 남아있었던, 땀에 젖은 옷을 입은 겐지의 모습은 '소설가의 각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책을 다시 읽었지만 내 기억에 남아있었던 그 문장이 보이지 않았다. (새삼 내 나이를 떠오르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재에 틀어박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런 생활에서 나오는 특징은 가식적이고 평면적인 것에 불과할 테니 그런 소설가는 한 명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술집이니 서재니 출판사, 때로는 골프장 등 지극히 한정된 장소를 오가면서 거의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 주제에 그럴싸한 구실을 구질구질 늘어놓는 소설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52쪽)


이 책은 마루야마 겐지의 자전적인 수필집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한 책이다. 위선적이고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찬 문학 세계에 대한 강력한 어퍼컷들로 이루어진 이 수필은 기분 좋은 편견들로만 가득차 있다. '여자와 게이에게 인기 있는 순간 끝'이라고 말하는 그는, 소설은 진지해야 하고 새로워야 하며 치열한 전투와도 같아야 된다고 믿는다. 

그의 소설 스타일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소 놀랍긴 하지만, 이런 소설가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센다이 시에 살 때 친구의 하숙방 옆방에 모인 T대학 문학 동아리가 갑론을박 격론을 펼치는 것을 벽 너머로 들은 일이 있다. 욕지기가 올라올 듯한 말싸움이었다. 놈들을 한 명씩 세워놓고 뺨따귀를 내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하필이면 소설을 쓰다니.(178쪽)


마루야마 겐지는 애초 소설을 쓸 계획이 없었다. 직장인이었으며, '소설쓰기는 건장한 청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틈틈히 쓴 첫 소설이 문학 잡지의 신인상을 받았고 그리고 그 소설이 아쿠타카와 상을 받게 된 것이다. 이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소설가가 되었다. 심지어 '어디서 베낀 것' 아니냐는 핀잔을 들었던 마루야마 겐지.

파격적인 발언들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읽지 않아도 대강 내용이 나오는 하루키의 신작 소설보다는 마루야마 겐지의 이 수필집을 감히 추천하는 바이다.

10년 전에 나온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아직 내가 소설을 쓰지 않으며(못하며), 소설가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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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에 대한 생각:  아마 뭔가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곧장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는 소설가가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만한 소설가도 없을 것이다. 솔직히 ‘해변의 카프카’만큼 실망한 소설도 없었다. 차라리 그의 초기 소설들은 재미있고 솔직하며 적당한 자신만만함으로 뻔한 허위와 기만에 빠질 수 있었다. 소설가 하루키의 치명적인 약점은 진지하게 이 세상에 대해서 성찰하려고 할 때 나타난다. 그는 애초부터 ‘여러 가지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여러 가지와 나 사이에 확실한 거리를 두고’(<상실의 시대>) 있었는데, 나이 들어 마치 그가 속해 있었던 외부 세계(현실)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하려는 모습은 황당하다. 그런데 ‘틀림없이 레미콘처럼 튼튼한 위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혹은 ‘소화제를 대량 복용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전문적인 평론가’들의 격찬이 역시나 이 세상은 깊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http://intempus.tistory.com/135 (오래 전에 쓴 짧은 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