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광고판이 붙은 버스, 최승호

지하련 2009. 12. 26. 11:52

아침에 일어나 서재 정리를 하면서 방바닥에 뒹구는 시집 한 권을 펼쳐 들어, 몇 편 읽었다. 승호 1991년도 시집이다. 이 때 시집 가격은 2,500. 하긴 그 때 학교 앞 식당에서 김치볶음밥 가격이 1,8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나는 한 끼 굶고 시집을 샀다. 요즘엔 새 시집을 거의 사지도, 읽지도 않지만. 확실히 현대란, 서사시의 시대이지, 서정시의 시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대 문학을 보면 서사시도, 서정시도 드물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불투명하고 모호해진 현대 세계 때문일까.

 

최승호세속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1)에 실린 시다. 마치 정권 바뀐 후의 우리 일상을 보여주는 듯해, 마음이 아리다.

 

 

 

 

광고판이 붙은 버스

 

 

운전사는 왕, 뽕짝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달린다, 폭군처럼 달려간다. 브레이크를 느닷없이, 계엄령처럼 다급히 밟을 때마다

거꾸로 내리박히고 나뒹굴고 엎어져 기지 않으려고, 무수한 나는, 무수한 중심을, 무수한 손잡이를 잡아야 했다. 선채로 흔들리는 객()들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다음은 고목나무 앞입니다그 다음은 망우리묘지 종점입니다, 라고 스피커가 앵무새 소리로, 늙음 뒤 뼈의 길과 망우(忘憂)의 길을 종알거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벌써 긴 세월을 새우처럼 갇힌 채 호송돼 온 느낌이었다.

그러자 새우깡 광고판이 붙은 버스가, 황혼에 물든 큰 거품 속으로, 속력을 내며 굴러가는 것이었다.

 

- 최승호, 1990년  




 

세속도시의 즐거움 - 8점
최승호 지음/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