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2월 26일: 구로디지털단지, 어느 스타벅스 안에서.

지하련 2010. 2. 28. 17:22

 

 

쓸쓸하고 우울한 따뜻함으로 채워진 대기가 건조한 빛깔의 벽과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을 둔탁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반사하는 유리로 지어진 빌딩 사이로 내려앉고 있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날씨지만, 이름 없는 행인들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딱딱한 염려가 섭씨 10도를 넘나드는 대기의 온도로 녹아 사라질 거라 믿는 듯 보였다. 신도림에서 미팅을 끝내고 구로디지털단지로 왔다.

 

노트와 펜을 샀다. 이동 중에, 아무렇게나 들른 가게에서 노트와 펜을 살 때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기 전의 기형도가 떠오른다. 이젠 시간이 많이 흘러, ‘세월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법한 과거의 인물이 되어버렸고, 기형도가 파고다 극장에서 그의 조용한 생을 마감할 때보다 더 나이가 든 나에게, 세상은, 아직도 모르는 곳이다.

 

커피의 온기가 사라지는 동안, 나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었다. 그리고 언제나 프루스트는 저 멀리 있는 어떤 이다. 이젠 너무 익숙한 거리감이다.  

 

 

그는 아저씨의 회색 두 눈동자를, 블론드의 코밑 수염을 그리고 무릎, 깊고 포근한 재롱의 장소, 더 어렸을 때는 은둔처였던 장소. 그 당시는 성채(城砦)와 같이 가까이 할 수 없게 여겨지고 목마처럼 즐거움에 넘치고 또 사원(寺院)처럼 침해하기 어려웠던 그 무릎을 그는 사랑했다.

 

 

잠시 그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창백함에 매우 감동되었다. 또 그녀의 창백한 이마나 애수를 띤 눈길이지만, 십자가 뒤에 걸린 고뇌처럼 또는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의 보상할 수 없는 상실 뒤에 오는 통곡과 같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피곤한 두 눈동자가 나타내는 무한한 절망에 감동되었다.

 

 

- 사랑의 기쁨, 민희식 역, 정암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