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논리와 현실, 그리고 우리 삶의 불투명성.

지하련 2010. 3. 9. 01:51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문득 내 나이를 떠올리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자 아팠다.


"상이한 두 개의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국영은행 시절 나는 국가의 돈을 가지고 화폐와 대출정책을 실행했습니다.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최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았어요. 첫째, 이 정책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둘째, 이 정책은 기업과 노동을 위해서도 유익할까? 그리고 세 번째 순위에 가서야 이 정책이 은행에도 유익할 것인가를 따졌습니다. 사적 자본을 위해 일할 때에는 우선 순위가 전도되었어요. 이 정책이 은행에 유익할까에 대한 질문이 우선이었지요."
- 에드가 모스트(동독 출신의 경제학자), 자서전 '자본을 위해 봉사한 50년' 중에서 인용.
(* 2009년 11월 르몽드 디플로마크 한국어판에서 재인용함)


통일 이후의 독일, 그리고 그 독일 속 동독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천천히 세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동독이 가졌던 장점과 자부심은 어느새 지워지고 그 사이를 자본주의의 이기적인 경쟁심만이 채우고 있더라고 전한다. 통일 당시의 흥분과 기쁨, 감격은 가물가물해지고 동독 사람들의 기억 속엔 그리운 동독, 차갑고 이기적인 자본주의 서독 중심의 통일 이후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중텐, 제국을 말하다'라는 책에서 저자 이중텐은 중국 제국 시스템을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말없이 묵묵히 일한 관료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청나라 말기를 이야기하면서 과거 제도과 유가 사상의 힘을 전하며, 중국 역사를 볼 때 청나라 말기는 외부 환경을 제외한다면 망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외부 세상은 변했고, 그 변화의 틈 속에서 중국 사람들이 무엇을 원했으며 변하기를 얼마나 열망했는가를 적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중국은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였다. 이중텐은 현대 중국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공화와 민주에 대해서 적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중국은 공산당이 나라의 전반을 운영하고 있으며, 어찌되었건 마르크스-엥겔스가 국가 정책의 기본처럼 자리잡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많이, 혹은 형편없이 윤색되고 흐려졌겠지만. (이중텐의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책들 중 한 권은 마르크스-엥겔스였다.)

그렇다면 입만 열면 좌파 정치인이라고, 좌파 NGO 단체라고, 좌익이라고 이야기해대는, 현재 한국을 살아가고 있는, 강렬한 민족애와 조국애로 무장한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해야만 된다. '우리는 중국과 교역을 끊어야 된다'고. 아마 논리적으로는 정당한 내 말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겠지만.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에 강력하게 주장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더라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먼저일까? 논리가 먼저일까, 아니면 현실이 먼저일까? 현실적 견지에서의 논리성 따위와 같은 추상적인 것은 생각하지 말자.

물론 나에게 이 물음에 대한 답도, 지혜도, 경험도 없다. 우리는 그저 안개 속을 걸어갈 뿐이다.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물음만 안고. 그런데 이 안개의 불투명성(불확실성)은 어느새 우리 일상 마저도 집어삼키고 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생각은 어떤가? 이 안개와 같은 불투명성을 부른 것은 우리가 약속이라도 하듯이 논리적인 어떤 것(이상)을 버리는 순간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임을. 그리고 더 낯선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서양이든 동양이든)이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과 논리의 이분법 속에서 현실을 택하자 일어나는 이 일상의 불투명성 앞에서, 최근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불투명하게 여겨졌다. 실은 논리적 귀결이 현실의 논리 앞에서 아무런 맥도 못추고, 그 어떤 현실적 동의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갑자기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될 터이지만, 이런 상황은 참 견디기 어렵다.

에드가 모스트의, 저 자조섞은 고백은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믿고 따랐던 신념이 무엇이었는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것이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