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아슬아슬하게

지하련 2010. 4. 24. 12:15

 

새벽 2시가 지나서야 사무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축축하게 처진 내 육체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피로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집에 도착해 바로 이부자리를 펴 누워, 종일 앞을 향하던 눈은 어둠 속에서 침묵을 배우고 내 영혼은 슬픈 상상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했다.

 

늘 그렇듯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고 몇 번을 잠에서 깼는지 모른다. 여러 번 뒤척이다 보니, 어느 새 새벽이었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육체와 영혼의 문제를 떠나, 마치 미로와 같은 우주 한 복판에 혼자 멍하게 앉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과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번갈아 들으며 밀린 세탁을 했고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도나텔로와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 도판을 보았다. 실은 회사 일도 했다.

 

딱딱하고 건조하면서 건강한 일상을 지내고 싶지만, 내 정신적 상태는 종종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울을 창조적인 사람의 특성이라고 어느 책에선가 적고 있지만, 그건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을 때에야 적용 가능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을 가르치던 이들이 쉽게 자기 반영성’, ‘분열된 자아따위를 이야기할 땐 나는 보이지 않는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작가가 그것을 드러내어 뛰어난 문학성의 완결된 작품을 만들 때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프레드 엘리네크의 소설을 읽으면 너무 잘 드러나는 속성이지만, 나는 엘리네크가 제 정신으로 일상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마치 로맹 가리의 모든 소설들이 나는 자살할거야라는 결심의 동어반복인 것처럼.

 

요즘 자주 우울해지고 슬퍼지고 맥이 풀려 내 몸의 모든 것들이 조각나 은하계 전체로 퍼져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든다.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는 하루를 살고 있다. 무섭다. 나는 내가 무섭다. 나도 알지 못하는 내가.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다. 일 트로바토레. 마치 공상 소설처럼 펼쳐지는 스토리는 종종 우리의 맥을 빠지게 하지만, 이 반대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노래들은 베르디의 음악성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