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책과 세계'(강유원) - 독서모임'빡센' 1차 모임.

지하련 2010. 7. 18. 09:01

틀에 박힌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딱딱하고 무거운 책을 끝까지 읽기도, 힘겹게 다 읽는다고 하더라도, 과연 제대로 읽었는지, 다른 이들은 혹시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아리송할 때가 많다. 이것이 독서 모임 빡센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첫 책으로 강유원의 책과 세계’(살림)를 선정했다. 책은 얇다. 두 번째 책으로 선정된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가 무려 9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인데 비해, 첫 번째 책은 두 번째 책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얇고 가볍다고 하여 읽기 만만한 책은 절대 아니다. 도리어 무겁고 두 세 번에 걸쳐 완독해야 할 책에 가깝다.

모인 이들은 책을 즐겨 읽으나, 독서 모임에 경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나 또한 독서 모임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오고 간 이야기는 두서 없었다. 그리고 두서 없는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긴 주제는 '쓸쓸함'이었다.


책의 시작부터 '쓸쓸한 세계'가 시작된다. 
 

 

쓸쓸한 세계: ‘길가메시 서사시

사람의 삶은 고되다. 고됨은 여가를 용납하지 않는다.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학문이 본래 여가라는 뜻을 가졌듯이, 여가가 없는 이들은 텍스트를 읽을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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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왜 쓸쓸해지는가에 대해 짧은 설명이 이어진다.  



참으로 덧없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고통스러운 세상, 쓸쓸한 인생. 유행가 가사 같은 정조는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인류 곁에 있었다.

후대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는 이렇게 말한다.

길가메시여, 그대가 찾는 것은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안겨주고 영생의 삶을 거두었기 때문이오. 그대가 살아있는 시간을 즐겁고 충만하게 보내오. 그대와 손을 잡는 어린아이를 사랑하오. 그대의 아내를 품에 즐겁게 해주오. 기껏해야 이런 것들만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 때문이오.

인간은 이렇게 읊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의 자리를 탐냈다. 만족되지 않는 욕구의 좌절. 사랑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수메르에는 사랑 노래가 드물다. 수천을 헤아리는 수메르 점토판 중에서 사랑을 다룬 시는 딱 두 편뿐이었다.

- 8쪽에서 9쪽까지



쓸쓸한 고대 세계에서 시작되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과 그 당시의 시대상을 언급하면서 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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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행복한 시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행복한 시대의 지식인은 처세와 개인의 안락을 위한 저작을 남긴다. 키케로의 우정론은 웅변, , 서한, 철학을 망라하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라틴어 문학의 백미로 간주되는 글이다. 행복한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저작에는 삶의 긴장보다는 문체의 다채로움을 위한 노고가 깊게 배어 있고, 또 그것으로써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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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행복한 시대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 우호적이지는 않는 듯 읽힌다. 

 

로마적 세계가 실용적이라 함은 달리 말해서 합리성의 극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성을 가치가 포함된 것이나, 독일의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사변적 합리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성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ratio’의 본래의 뜻, 계산으로 파악해야 한다. 로마는 이성적이었으므로 계산이 분명한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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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 내내 현대 지식인의 쓸쓸한 세계 인식, 고대 세계와 현대, 로마 시대의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임 중간중간 내 의견을 이야기했다. 아래는 두서 없었던 내 의견의 일부다.

1. 인류가 이성을 가지는 순간, 쓸쓸하다는 감정은 운명처럼 깃든다. 이성이란 내가 아닌 나 밖의 외부 세계를 인식을 한다는 것을 뜻하며, 나와 외부 타자를 경계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이 지성을 가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나 밖으로 펼쳐진 자연을 객관화시킬 수 있고 질서를 부여하게 되었으며, 나와 타자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런데 이 지성(문명)의 시작은 '나'를 홀로 있게 한다. 쓸쓸한 자아는 이렇게 시작된다.

결국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존재(데카르트적 자아의 붕괴)가 되며, 그것으로 인해 외부 세계마저도 붕괴되는 현대로 이르게 된다. 마치 길가메시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듯, 인간의 이성도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이성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이성으로 전락하게 되는 포스트 모던에 이르게 되는...

2. 로마와 현대
역사적으로 현대와 가장 유사한 시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헬레니즘을 지나쳐가는 후기 로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세계가 천천히 무너지고 사람들이 가상의 놀이문화에 빠져들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교육 제도가 붕괴되며 모든 일상 생활이 계약 관계로 성립되던 시기가 후기 로마였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깊이 없는(천박한) ratio에 기반해 있다. 현대도 이와 비슷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여러 학자들이 비판하는 도구적 이성의 본격적 시작도 이 로마 시대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겠지만, 로마적 행복의 귀결이 중세적 세계라면 과연 그것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가?   

로마 시대에 대한 탁월한 해설서는 제롬 카르코피노의 저서다. 보기 드물게 탁월한 역사책이다.

고대 로마의 일상 생활, 제롬 카르코피노 지음(우물이 있는 집)
http://intempus.tistory.com/889


2번째 독서 모임 '빡센'은 8월 첫번째 토요일 오후에 열린다. 혹시 관심 있는 분이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 책 '16세기 문화 혁명'을 읽고 참가하면 된다. 두서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이야기할 거리를 가지고 와야할 것이다. (독서 모임에 대한 안내는 본 블로그 공지사항을 확인하거나 검색)



빡센의 첫 번째 책.

책과 세계 - 10점
강유원 지음/살림


빡센의 두 번째 책.

16세기 문화혁명 - 10점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남윤호 옮김/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