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네모에 대하여

지하련 2003. 9. 23. 11:22



일렬로 늘어선 아파트들 위로 나즈막하게 몰려든 회색 빛 구름들이, 스스로의 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지려는 찰라,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름지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생긴 구름 뭉치들이 네모반듯한 벽돌 모양으로 쪼개지더니, 아파트 단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실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한 구름의 무게가 늙어가면서 허공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다는 것쯤은 사랑에 빠지지 않은 이들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네모난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십년동안 클럽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구입한 상아 건반 피아노를 두드리면서 '네모', '네모','네모'라고 중얼거린다. 실은 네모난 건 너무 많다. 빨리 달려야만 지나갈 수 있다는 고속도로의 이정표들도 네모이고 그 곳을 지나가는 차들의 번호판도 네모이고 운전자가 가진 운전면허증도, 신분증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들의 영혼마저도 네모일 지도 모른다.

실은 피아니스트가 문제였다. 네모난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네모난 의자에 앉아 네모난 건반응 두드렸을 때, 네모난 것들의 세계가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무런 향도 없고 아무런 소리도, 율동도 없는 세계에 네모난 소리들이 뛰쳐나오게 되었을 때, 세상은 변신을 준비한다.

익히 알려져 있는 잠자의 변신이 20세기적 주제라면, 생물학의 시대이면서 생명에 대해 경멸했던 이들이 지배했던 시대의,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였다. 이는 카프카 선생의 식습관에서 유래했다. 이를 선생의 여러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연관시킨다면, 매우 대단한 착오를 저지르는 일이다.

식습관 이야기가 나와 잠시 덧붙이자면, 네모난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의 입모양도 네모났다는 것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존재, 혹은 한 예술가의 명확한 세계 인식은 입모양과 식습관에서 유래한다. 또는 기인한다.

실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오늘 병원에 갔더니, 심장이 네모랗게 변하는 희귀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명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말투와 손짓과 눈빛과 사랑의 행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여러 번 티브이뉴스와 잡지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설마 나에게 걸릴 것이라곤 미처 알지 못했다. 동그렇게 변하는 병은 없나요? 라고 의사에게 물어보았지만, 손톱을 네모랗게 성형수술을 한 여의사는, 난 당신의 팬이예요라면서 다리를 벌려보였다.

난 팔을 벌렸다. 그러자 그녀는 다리를 오무렸다. 나도 팔을 오므렸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다리를 벌렸다. 난 팔을 벌렸다. 그러자 그녀는 다리를 오무렸다. 나도 팔을 오므렸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다리를 벌렸다. 난 팔을 벌렸다. 그러자 그녀는 다리를 오무렸다. 나도 팔을 오므렸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다리를 벌렸다. 난 팔을 오므린 채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