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바타이유와 영국현대미술전

지하련 1998. 9. 24. 21:29
       공작은 그녀를 따라갔다. 그는 그녀가 걷는 것을 바라보았
     다. 그녀는 왼쪽으로 한 발짝, 오른쪽으로 한 발짝 걷더니, 고
     개를 숙였다.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불안했던 것일까? 공자그
     는 고개를 숙이고, 탐욕스럽게 빙긋이 웃었다. 그는 그녀를 꿈
     꾸었다. 거인만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딸의 눈 속에 이
     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욕망과 기다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시간의 지배자』중에서,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           *

       작년에 나온 몇 개의 뛰어난 소설들 중의 하나. 매혹적인
     이름,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그와 술을 마신 선배의 평에 의하
     면, "아직 어린 친구다"였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는 나보다
     어리거나, 같은 나이일 것이다.
      
       오늘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 왔다.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근대를 보는 눈』(수묵. 채색화)와 아름답지 않지만, 그러나
     가슴 저린 『영국 현대 미술전』을 보았다.
    
       『근대를 보는 눈』은 올초에 있었던 한국 근대 유화 전시
     에 이어 기획된 전시였다. 이 전시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왜냐면, 작가나 작품의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작품을
     전시하였기 때문에. 그러나, 이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서 국립
     현대미술관 측은 몇 년을 준비했을 것이다.
    
       『영국 현대 미술전』는 현대 미술이 어떤 경향으로 흘러가
     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전시회이다. 현대 미술에 관심없는 사
     람이라면, 분명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따위 것들을 작품이라
     고 버젓이 전시해놓았는가' 라는 푸념을 할 것임에 분명하지
     만, 그런 작품을 만든 작가들의 변명을 혹시라도 듣게 된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지도 모른다.

       영국의 젊은 작가들이 고민하는 것이나 한국의 젊은이가 고
     민하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우린 세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근대를 보는 눈』에는 관
     람객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근대에 너
     무 무관심한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