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제가 가지고 있던 책을 나누어 드립니다.

지하련 2010. 12. 27. 11:25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한강이 보입니다. 아침 출근길, 동쪽으로부터 몰려온 햇살에 밝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육삼빌딩을 뒤로 하고 아파트 1층 현관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사를 했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이사였습니다. 그리고 38년의 생을 힘겹게 지탱해주던 책들의 상당수는 이번 이사에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무지개 빛깔이 숨겨진, 어떤 면에선 당황스러운 감도 없지 않은 이사였고, 책들의 입장에선 책임감 없는 주인을 만난 탓이겠지요.

그 책들은, 내게는 물질적 욕망을 향한 폭풍우 같은 자본주의 세계가 요구하는 사고력과 실행력이 없었던 나의 아슬아슬한 삶을 증명하고 변명하던 사유의 물리적 성벽과도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가상이었으며, 일루전이었고, 아침이 되면 사라지는 별과 같다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무너져가는 구세계의 믿음을 지키며 글을 썼던 에라스무스처럼 나도 그런 문필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너무 깊숙이 자본주의 속에 들어와 있었고, 그 영지를 벗어나기엔 그 사이 내가 이루어 놓았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자기만의 생이었고 이른 나이에 많은 모험과, 그로 인한 실패, 특히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깊은 절망을 경험한 탓이었습니다.

버릴 책들을 챙기면서, 문득 나는 이 많은 책들을 사 읽으면서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되새겨보게 되었습니다. 늘 단단하고 견고한 언어를 꿈꾸었지만, 번번이 그 언어들은 나를 멀리 했고 나도 그 언어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사소한 내 변명으로 귀결됩니다. 라이오넬 트릴링이 '자기 진실성'(Authenticity)이 바로 이런 것일까요. 현실과 이상은 마치 야누스처럼 하나이면서 둘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이제 현실 쪽으로 기울어져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이에 내일, 2010년 12월 31일 작은 이벤트를 마련했습니다.

오랜 시절 내 삶의 지탱자였던 책들을 나누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내가 읽었던 책들이고 그 중에는 지금은 구하기도 어려운, 좋은 책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뛰어난 작가의 소설집도 있고 아름다운 사진들로 채워진 사진집도 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날, 책 나누어주기가 끝나고 난 뒤, 시간 되는 이들과 남아 조촐하게 술 한 잔 마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책 고르기, 책 사기, 책 읽기, 책 보관하기, 책 버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오후 5시 이후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9호선 공항시장역 인근에서 이 이벤트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참여코자 하는 이들은 yongsup.kim@yahoo.com / intempus@naver.com 으로 메일로 연락처(핸드폰 번호)를 남겨주세요. 먼저 메일로 약도를 보내드리고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