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비평

하루키, 또는 현대적 삶

지하련 2003. 10. 29. 14:54
하루키, 또는 현대적 삶



모든 것은 지나쳐간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의 어두운 면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의 초점 이동에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은 [높낮이 없이] 덤덤하게 되고 협소해진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우리는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
-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 사회>





1. 하루키 신드롬

아직도 하루키 신드롬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하루키는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있으니 말이다. 꽤 오래 전엔 매우 시끄러웠다. 여기저기 저널에서, 문학잡지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키를 표절했다느니, 패러디했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고 서로 그 영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참 표피적인 반응들이었다. 왜 우리 세대는 이 일본 소설가에게 열광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팔려나가는 그의 대중적 인기를 폄하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완성도나 문학사적 위상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소모적인 업무에 시달리다 퇴근 후 잠시 시간을 내어 새로 나온 하루키의 소설과 오래 전에 읽고 서가 구석에서 먼지를 먹고 있었던 소설들을 다시 꺼내어 오래 전 독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 글을 쓰는 샐러리맨이 하루키의 문학적 완성도나 문학사적 위상을 논하는 글을 쓴다면, 그건 하루키 식으로 말해서 투 아웃 만루 상황에 보란 듯이 볼을 던져 타자의 머리를 맞추는 투수와 비슷한 처지가 될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나에게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끊임없이 맥주 생각을 나게 하는 몇 안 되는 소설가이다. 이러한 반응은 일종의 공감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하루키를 읽으면 맥주 생각이 나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캔 맥주를 마시다보면 우울해지고 까닭 없이 슬퍼진다. 이것이 하루키가 가진 매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하루키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은 이 한계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을 쓰는 이가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하루키를 읽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혼자. 책 읽다 말고 음악 들으며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2. ‘나’의 세계

하루키의 소설은 다들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는 일본의 사소설 경향에 영향받은 탓이기도 하지만, 공교롭게도 현대의 개인주의를 바탕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나’는 나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도 않고 자세히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나는 ‘나’에 대한 공감이나 변호를 하지 않으며 자세하게 ‘나’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으로 나의 주위를 보여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69년 8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3일까지, 나는 358회 강의에 출석했고, 54회의 섹스를 했으며, 6,921개피의 담배를 피웠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위 문장은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특징을 매우 잘 드러낸다. 문학의 전통적 경향에서는 하나의 인물, 하나의 사건에 대한 구체성의 확보는 치밀한 심리 묘사나 상황 묘사로 이루어졌지만, 하루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거나 상표들의 제시로 이어진다.

하루키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인주의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태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치밀한 묘사나 자기 방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슬픈 상대주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외부 세계와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구할 수 없다는 태도는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하루키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극적인 형태로 ‘나’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지만, 이는 구체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환상(관념) 속의 세계 속에 머물러버리는 자폐적 세계를 긍정하는, 극단적인 니힐니즘을 보여주게 된다.



3. 도시적 삶의 양태

스마트하게 작은 번역사무소를 친구와 경영하거나 원고를 쓰고, 명예도, 돈도, 그리고 사회적인 신분도 탐하지 않는, 특별히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 궁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생활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맥주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빵 가게에 가든지, 적당히 자기 손으로 요리해서 배를 채우고, 때때로 여자와 자고, ... 어쩌면 우아하게까지 보이는 것이 하루키 소설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 <하루키 문학수첩>(문학사상사) 중에서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은 도시에 살아가는 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보았던 삶은 아닐까. 적당하게 쓸쓸하게, 적당하게 자신의 욕구를 채우며, 적당하게 자유를 누리는 삶.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현대 도시에서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돈’이 심각하게 다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돈’마저도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 속으로 빨려들어,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은 쉽게 벌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이 등장한다. 어차피 쓸쓸할 것이라면, 어차피 욕구를 채울 것이라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책임이나 의무 따윈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어디선가에서 던져진 세계이고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한 개인은 그 세계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적극적인 형태가 아니라 소극적인 형태로. 이 소극적인 태도를 우아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하루키는 다양한 문화적 기호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얼마만큼 견딜 수 있을까. 끝내 마주하게 되는 건 거대한 세상 속에서 혼자, 스스로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한 개인, 자기 자신일 테니 말이다.



4. 환상 속으로 들어가다

소극적인 태도로만 지탱하기에 이 세계는 무척 견고하고 폭력적이다. 니힐리즘이란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도피하기 위한 태도이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게 되는 환상적인 사건이나 환상적인 세계-현실 세계와 대비되어 나타나는-는 현실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도피하기 위해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무라카미 문학의 특징은, 사회에 대해서, 혹은 개인 생활의 가장 가까운 환경에 대해서조차도 일체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관습에서 비롯되는 환경으로부터의 영향엔 저항하지 않고, 마치 배경 음악을 듣는 것처럼 순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파괴된 내적인 몽상의 세계를 짜내는, 그것이 그의 방법입니다.
- 오에 겐자부로, <하루키 문학수첩>(문학사상사) 중에서

하지만 소극적인 태도로 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게 된 소설 속의 주인공은 어떤 적극적인 태도를 마련하기 위해 환상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이 가진 약점을 분명히 알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환상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하루키는 여기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하나는 완벽한 니힐리즘이며 하나는 어정쩡한 현실 세계로의 복귀이다. 전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이며 후자는 <해변의 카프카>이다.

<해변의 카프카>의 어린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가진 문제점을 풀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해답은 여행 도중에 꾸게 되는 꿈이거나 마주치는 환상 세계 속에서 이다. 그리고 그가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되는 것도 환상 세계 속에서 만난 한 여자 때문이다.

<해변의 카프카>가 지닌 한계는 여기에 있다.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소극적인 현실 인식이나 삶의 태도는, 그의 초기 소설 속에서는 현실 부정으로 이어졌다면 최근의 소설 속에서는 과거의 어떤 인물, 혹은 추억에 의해 적극적인 태도로의 전환을 꾀한다는 점이다. 이는 명확한 현실 인식이나 이해에 기반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은 여전히 모르는 상태로 놓여져 있으며 혼자 살아가는 쓸쓸한 인생은 그대로이면서, 그 세계를 살아가게 하는 건 추억이나 기억의 힘이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듯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소원해지고 그렇게 고독이 남고 쓸쓸함이 남고 삶의 무의미만 허공에 가득할 때, 하루키의 주인공은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여행을 떠나거나 누군가를 만나 방황을 한다. 그리고 방황 속에서 환상 속으로 말려들어가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삶의 의미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그저 살아가야 할지 않을까 따위의 소극적인 것들이다.



5. 그러나, 삶 속의 우리

하루키의 소설은 재미있다. 그러나 이 재미는 하루키의 문장이 가진 재미이기도 하겠지만, 하루키 식으로 우리의 인생이나 우리가 속한 세계에 대해 Cool해지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만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진행형으로 남아있고 소극적인 태도를 가진 자아가 획득하게 되는 것은 인생의 의미 따위가 아니라 무의미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변명 정도이다.

그렇다면 별 다른 답이 존재하는가?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한계는 현대 문명이 가진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 별 수 없군’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의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만큼 슬프고 끔찍한 일도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