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가

라우셴버그의 '지워진 드 쿠닝의 그림'

지하련 2012. 2. 18. 21:54



 

1959년, 무명의 젊은 미술가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는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에게 어떤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데 쿠닝은 라우셴버그보다 나이가 많고 훨씬 유명했을 뿐 아니라 작품값도 상당히 비쌌지만 그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한 점을 라우셴버그에게 주었다. 크레용과 유성연필, 잉크, 흑연 등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라우셴버그는 그 그림을 가지고 한 달을 씨름했다. 그림을 완전히 지운 것이다. 이어서 그는 그 지운 그림을 금박 액자에 끼우고,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 1953년(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이라고 제목과 날짜를 직접 써 넣었다. 라우셴버그는 데 쿠닝의 그림을 지웠을 뿐 아니라, 그 ‘지움’을 자기 작품으로 전시도 했다. 라우셴버그는 작품을 창조한 것인가, 파괴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 ‘예술이 궁금하다’, 마거릿 P. 배틴 외 지음, 윤자정 옮김(현실문화연구, 2004년), 59쪽에서 인용


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
Robert Rauschenberg
출처: http://secretforts.blogspot.com/2011/02/erased-de-kooning-drawing-1953.html 


일종의 해프닝Happening이다. 창작(연출) 과정이 예술이 되고 그 과정의 결과물도 예술이 된다. 드 쿠닝도 예술 창작자이고 라우셴버그도 예술 창작자가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의 기획자이자 완결자는 라우셴버그임으로 그가 작품의 서명자가 된 셈이겠지.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 미술 현대 미술의 흥미로운 한 장면을 연출했다. 또한 ‘예술 작품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창조되는가?’라는 꽤나 미학적으로 유쾌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 서가에서 꺼내, 다시 읽고 있는 <<예술이 궁금하다>> 1장 ‘예술과 예술작품’의 한 사례로 등장한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 1953년(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은 현대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 작품, 또는 예술 작품 창작 과정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가면 개념 미술Conceptual Art과 만나게 된다.

라우셴버그의 작품 이미지를 찾다가, 마이크 비들로(Mike Bidlo)가 최근에 발표한 'Not Robert Rauschenberg: Erased de Kooning Drawing, 2005'을 보며 웃었다. 마이크 비들로는 'Not Warhol(Brillo Boxes, 1964)', 1991이라는 작품으로 국내에 알려져 있는데(엔디 워홀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따라하기를 해서 유명해진 것이지만), 이번에는 라우셴버그의 해프닝을 따라했다(이것도 현대 예술가들의 무시하지 못할 전략 중의 하나다).


Mike Bidlo Not Robert Rauschenberg: Erased de Kooning Drawing, 2005. Traces of graphite on paper, mat and label in gold leaf frame. 22-3/8 x 20-7/8 inches. Courtesy of Francis M. Naumann Fine Art, New York.
출처: http://www.artlurker.com/2009/01/objects-of-value-at-miami-art-museum/ 

라우셴버그의 인터뷰 - '지워진 드 쿠닝의 그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