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무관심의 절정, 장 보드리야르

지하련 2003. 12. 15. 20:57
무관심의 절정 - 6점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은민 옮김/동문선


무관심의 절정

장 보드리야르/필리프 프티와의 대담, 이은민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80



영화 <<매트릭스>>의 주연 배우인 키아누 리버스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고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의 국내 광고에서 본 것이긴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충격적이라는 것은, 내가 보기엔 그의 사상은 기존 관념이나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체계적인 사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스타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과격한 논리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문제는 진지함과 성실함이 미덕으로 간주되어야 할 학문의 세계 속에서도 갈수록 말장난만 심해지는 이 사상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말장난은 언뜻 보기엔 뭔가 대단해 보이는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여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책을 읽고 그 책의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가 아주 대단한 사상가라고 오해한다는 점이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가지는 ‘미학주의’의 무책임함과 경박함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는 ‘노동자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자본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벗어나는 이들은 부모들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사라졌고, 계급 투쟁도 끝났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 자유를 상실했고 더 이상 자기 원천의, 자기 목적의 주인도 아닙니다. 그는 네트워크의 볼모입니다. 우선권은 네트워크에 있지 그것에 가입한 사람에 있지 않습니다. 집단 역시 네트워크 쪽에 있지 개인 쪽에 있지 않습니다. 집단 역시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상의 하이퍼 리얼리티는 동시에 이 두 항을 삼켜왔습니다. 개인/집단의 이 극점들은 약화됩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이 세계는 갈등이 끝났으므로, 역사에는 종말이 왔고(* 후쿠야마와 비슷한 견해임) 이제 개인, 즉 주체는 자유도, 목적도, 정체성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어떤 야만성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동물적 세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심각하게 가상과 실재를 혼동하고 있다. 즉 그에겐 이미 실재란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쉽게 말해 그에게 가서 ‘당신은 아무 의미 없는 실재구만’이라고 말하곤 감옥에 넣어버린다고 해서 그는 아무런 짓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이론 속에선.

아마 혹자는 그것을 단어 그대로 이해하지 말고 은유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은유’란 문학이나 예술의 단어이지, 철학이나 사상의 단어는 아니라는 점을 명시해야만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 두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끄 데리다의 경우 이 둘 사이를 오가면서 철학의 허구성을 해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비실재성이 실재를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 앞에는 언제나 우리의 삶이 놓여 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 앞에는 우리 삶이 놓여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면서 자신이 맞다고 주장하는 말장난에 능한 얼치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무수한 식자들이 있고. 한 번 보드리야르의 팬들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대로 한 번 살아본다면 어떨까? 까뮈의 팬들이 뫼르소처럼 살아가지 않는 이유는 문학이 가진 미덕과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설마 나에게 보드리야르는 위대한 소설가예요라고 말하는 이는 없겠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