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하련 2012. 6. 26. 12:31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10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민음사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Memoria de Mis Putas Tristes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1.
이름 없는 사람들의 독자성으로 포장된, 도시인의 무관심으로 가득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맞은 편 사람에게 떠들고 있을 뿐인, 소란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도심의 커피숍에는 무의미한 젊음을 소비하기 위한 21세기의 이십대만 가득했다. 희망을 잃어가는 중년은 없었고, 이승만, 새마을운동, 유신 시대를 겪었던 과거의 기억을 마치 찬란했던 영화처럼 여기는 노년도 없었다. 그저 방향을 잃어버렸고 애초에 방향 따윈 없었던 이십대만 있었던 어느 커피숍에서 나는 1928년에 태어난, 어느 소설가의 소설을 쫓기듯이 다 읽었다.

‘소설을 쫓기듯이 읽었다’는 표현이 주는 당혹감이나 처참한 기분을 알 만한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요즘 내 일상이다. 하긴 다행스러운 것은 이 소설은 해피앤딩이다. 요즘 보기 드문, 결코 일어나기 힘든, 행복한 결말이다. 마지막 문장을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볼까. 



2. 
태양은 공원의 편도나무 사이로 떠올랐고, 강이 마른 탓에 일주일이나 늦게 도착한 하천 우편선이 포효하면서 항구로 들어왔다.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 151쪽 


사랑이야기다. 그것도 천연덕스럽고 이국적인 느낌까지 자아내는,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종류의 이야기다. 아흔이 된 노인네의 사랑이야기라니! 그것도 몸을 팔기 위해 나선 사춘기 소녀(창녀)와의, 말도 안 되는 러브 스토리. 

그러니 마르케스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 소설은 아흔이 된 주인공의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아름다운 마음을 만날 수 있고, 그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소설 속 사람들-다 창녀였거나 창녀와 관계되었던 - 을 만날 수 있다. 

세월이 참 많이 흐른 것이다. 노년의 소설가 마르케스는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만으로도 감동받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떤 어린, 하지만 순수한 창녀를 추억한다. 거친 현실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인 아흔의 노인은 젊었던 시절 자신을 받아주었던, 한때의 창녀에게 위로의 조언을 듣기까지 한다.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하지만 그 아이를 잃어버리지는 마세요.” 그녀는 말했다. “혼자 죽는 것보다 더한 불행은 없어요.” 
- 131쪽 


3.
소설은 오직 주인공의 철부지 같은 생각, 이해하기 힘든 태도, 쓸쓸한 추억을 따라 흐르며, 낡은 흑백 사진과도 같은 사랑을 되새긴다. 그리곤 끝이다. 정열적인 키스 같은 것도, 사랑의 밀어도, 사랑을 지키기 위한 분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케스만이 가능한 소설이고 마르케스이니, 가능한 사랑이야기인 셈이다. 

소설은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은, 그 사랑이 어떤 것이든 가치 있고 축복 받을 일이다. 마음의 편견과 벽을 허물고 누군가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마르케스는 우아하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현실은 노년의 마르케스가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랑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상적이 아니라 현실적이기만 하다. 부언하자면 이상적으로 포장되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그 현실적 사랑의 아름다운 면만 보여준 셈이다. 결국은 우리는 땅을 딛고 서있어야만 하지, 하늘을 날 수는 없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만 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선 뭔가 준비를 해야만 한다. 결국 사랑도 현실적인 고려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협상에 가깝고, 현대의 이론을 빌리자면, 그건 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마르케스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오직 아름다운 노년과 사춘기 소녀 간의 사랑을 우아하게 들려주고 있으니까. 

오래 기억할 좋은 소설을 읽었다. 다만 쫓기듯 읽은 참혹함만 쓸쓸하게 내 중년의 페이지를 장식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