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하련 2012. 8. 26. 16:37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 10점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마음산책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Pol-Serge Kakon)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i12bent.tumblr.com/post/242749612/jean-seberg-nov-13-1938-1979-was-an  



그러고 보면 이 책의 독자는 정해져 있었다. 로맹 가리Romain Gary, 혹은 에밀 아자르Emile Ajar의 팬이거나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의 여 주인공 진 세버그Jean Seberg를 잊지 못하는 이들로. 그러나 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재미있지 않다.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글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장은 우아하지도 치밀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십 대의, 소년같았던 진 세버그를 잊지 누벨 바그La Nouvelle Vague 팬들에게 이 책은 진 세버그의 불행했던 정의감과 열정, 정처 없이 나약하기만 했던 사랑의 감정을, 술과 약에 취해 있던 그녀를 지켜주던 로맹 가리의 마음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연이 어느 날 이 길이 아니라 저 길로 지나갔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누구나 의문을 품어본다. 생각 없이 극장 문이나 교회당 입구에 들어서는 일, 한 발짝의 걸음이 그렇듯이 한 번의 눈길이, 미소가 인생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81쪽)




책은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인생, 그리고 그 둘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 자살로 이어지는 여러 장면들을 시간 순에 따라 배열하고 있다. 때로는 무미건조하게, 때로는 서정적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에밀 아자르를 제외하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사려고 노력했던 로맹 가리와, 그와는 확연히 다른, 격정적이며 혼란스럽고 정처 없는 삶을 살다 마흔 하나에 자살하는 진 세버그 사이에서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서술하기란 저자인 폴 세르주 카콩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꽤 벅찬 일이였으리라. 그 만큼 둘의 인생은 확연한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엔 사랑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문제이고, 사랑은 거친 현실적 삶 속에서 잊히는 것이다. 진 세버그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잊고 싶었을 것이고, 우연히 만나는 낯선 사랑이 자기 삶의 해답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흑인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젊은 시절의 불합리를 고치고 싶었을 테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비현실적이었고 미 정부와 FBI는 그녀의 그런 활동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방해하고 압박했다(이 책에서 이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유대인으로 자라 2차 세계대전을 참전하였던 조종사 출신의, 소설가 로맹 가리에게 이러한 진 세버그의 열정은 한편으로는 아름다웠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 세버그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로맹 가리는 혼신을 다해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치 딸에게 여느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권총을 입에 물고 당기기 전 책상에 남긴 편지에 가리는 이렇게 썼다.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깨진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길” (231쪽)



진 세버그가 그녀의 차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 1년 후, 로맹 가리도 권총 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프랑스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에밀 아자르가 실은 로맹 가리 자신이었음이 밝혀지고, 로맹 가리를 비난하면서 에밀 아자르에겐 격찬을 보냈던 문학 평론가들은 입을 닫았다.



언젠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이 작가는 자살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 어쩌면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에 대한 사랑을 에밀 아자르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말 대로 ‘이 경계를 넘어서면 당신의 승차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Au-delà de cette limite votre ticket n'est plus valable).’






출처: http://www.purepeople.com/media/romain-gary-et-jean-seberg-en-1971_m573983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고 포기를 모르는 마음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랑에 대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 그리고 진 세버그 팬에게만 권할 뿐, 나머지 독자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이 책은 그 가치를 발휘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