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

지하련 2013. 8. 15. 23:49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 10점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갈무리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지음), 홍철기(옮김), 갈무리, 2009 





야만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야 말로 야만인이다. 

-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






직장 생활을 하며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가를 새삼 느꼈다. 솔직히 끔찍했다. 사무실에 인문학 책을 꺼내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고 집에 돌아와 책을 읽는 건 불가능하며(연신 나를 찾는 이제 20개월 정도를 넘긴 아들 녀석으로 인해), 내가 책을 읽는 시간이라곤, 아들이 잠든 후나 이동 중인 전철이거나 잠시 들른 커피숍이 전부다. 이 푸념이 나에게도 생소하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 독서는 참으로 멀리 있는 것인 듯 싶다. 


좀 더 많은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집중해 읽었다면 라투르의 이 책은 보다 더 흥미롭고 내가 벗어나지 못할 근대적, 계몽적 사유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 기회를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몇 년 전 서점에서 우연히 구입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제목이 무척 도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읽었다. 아마 한 두 번 읽으려고 했을 텐데, 저자의 표현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쓰는 몇 개의 주요 단어들 - 하이브리드, 정화, 대칭적/비대칭적 등 - 에 대해선,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더 어렵고 모호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마 프랑스학계 특유의 글쓰기 방식인 듯하지만(프랑스의 다른 인문학자들처럼). 



야생의 사유와 계몽된 사유는 때때로 서로 아름다운 화해에 도달하거나 무지개 빛깔을 발하는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 - 7쪽 



혹시 지금 우리 시대가 '근대'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데카르트적 근대 말이다. 아니면 20세기의 무수한 반-근대주의자들처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정말로 그들의 책에서 이야기하듯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움직이고 있는가? 


 


원시의 정신과 오늘 우리의 정신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부될 것이다. 정보이론이 순수한 메시지에 집중한 반면에 원시 시대 사람들은 메시지의 물리적 결정론의 징후들을 메시지로 착각한다. ... ... 동식물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특성들을 하나의 메시지인양 다루고 그 속에서 '서명' 즉 기호를 읽어냄으로써 인간(원시정신의 소유자)은 엉뚱한 것을 중요한 요소로 삼는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실제 의미 있는 요소가 어디에 있는지(미시적인 차원)를 알려줄 완성된 도구가 없었기에 인류를 해석을 통해 '희미하게' as through a glass darkly 나름대로 차이를 분간하였다. 이 원리의 발견적 가치와 현실의 정합성은 첨단 발명품들 즉 전기통신공학, 컴퓨터와 전자현미경 등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 바 있다. 

- 249쪽 (Levi-Strauss, 1966, p268)



브뤼노 라투르는 인류학에 의지해, 근대라는 개념은 개념일 뿐, 우리 세상을 그대로 비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마치 애초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그리고 그 단추를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이 근대에서 시작된 '탈-근대'로 이상하긴 마찬가지. 


그렇다고 라투르가 '비-근대주의자'는 아니다. 그의 목표는 '화해'에 있으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출발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자는 데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인문학이 이 세계와 우리 삶 속에서 시작되었으나, 도리어 이 세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해석 불가능하다고 단정짓고, 우리 삶을 기하학적으로 재단하고 억지로 정해진 어떤 틀 속에서 밀어넣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근대적 삶이고 근대의 이론들인 셈이다. 



아추아르족은 각자 폐쇄된 채로 대립을 피할 수 없는 두 세계 - 인간 사회의 문화세계와 동물 사회의 자연세계 -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이율배반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화의 연속적 가능성이 끊어지는 특정한 지점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부터 인간에게는 극도로 낯선 야생의 세계가 시작된다. 문화의 영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자연의 이 조그만 조각은 소통관계가 수립될 수 없는 사물들의 집합을 포함한다.

- 53쪽 (Philippe Descola의 1986년도 저작에서 인용. 



아추아르족의 일상에서 우리의 일상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은 인문학이 앞으로 어떤 태도로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지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으나, 근현대 철학은 우리의 진정한 세계와 무관하게 전진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투르는 근대의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 그 근대인은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두서 없는 리뷰이지만, 여유가 되는 이들에게 이 책 읽기를 권한다. 좀 시간은 걸리겠지만, 꽤 흥미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