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misc. 2014.09. 05.

지하련 2014. 9. 5. 09:33



창원에 내려가기 위해 옷 몇 가지를 챙겨 집을 나왔다.  아내와 아이는 이미 창원에 내려갔고, 오늘 저녁 모임을 나간 뒤 심야 우등 버스를 탈 계획이다. 어젠 이런 저런 업무들로 인해 밤 늦게 사무실에 나올 수 있었고 벌써 내 나이도 사십대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누군가 정해준 곳으로 갔으며, 심지어 대학 전공마저도 그랬다. 나처럼 고등학교 3년 내내 모의 고사에서 한 곳만 지원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그 대학 그 전공을 다 마치고 한참 후에야 내가 받은 대학 교육의 형편없음을 욕했지만).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 당하며 산다. 내 의지대로 의사결정 내리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내 의지대로 하지 못한 어떤 결정, 행동,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에 대해 다른 이의 결정, 행동, 결과와 비교당한다. 부모로부터, 학교 선생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사회로부터. 나와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취향, 다른 배경, 다른 생각을 가진 이와 비교당하며 자라고 성장하여 (빌어먹을) 성인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의 압력으로 결정하고 행동한 결과가 형편없고 실패했을 경우, 그 책임은 압력을 행사한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지고 내가 상처입고 내가 쓰러진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왜냐면 한국 사회만큼 실패에 대해 냉혹할 정도 무관심하며 실패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가혹할 정도로 공격하는 곳도 없으니까. 


최악의 경우, 나는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 상황에서 누군가, 혹은 사회에 의해 강압된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고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십대 중반을 향하는 지금, 나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말썽꾸러기로 변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내 생활은 자유와 방종을 오갔으며 굶는 대신 시집을 사고 굶는 대신 청계천에서 중고 오디오를 샀다. 학교 구내 식당에서 한 끼만 제대로 챙겨먹으면 된다고 여겼으니. 가장 오래 다닌 회사는 만 3년 6개월 정도인데, 이는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 였다. 그 전까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여기저길 옮겨다녔다. IT - Consulting - editorial - Gallery - Art Fair - IT(Telecom - Digital Agency - Digital Contents). 


가장 다행인 것은 내 의지대로(혹은 어쩔 수 없는 경제적 사정도 있었지만), 혹은 결정의 주체는 온전히 나였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무척 많은 노력을 하고 마음 속으로 각오를 다진다. 그래서 아직까지 버틴다. 앞으로도 버틸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고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그게 싫다면 혼자일 때 바다를 건너, 하늘을 건너 멀리 떠나라. 그리고 새로 시작해라. 어차피 한국 사회에서 우리 대부분은 비교당하면서 가난하게 평범하거나 실패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자신의 의지대로 평범하거나 실패하라. 그러면 견딜 수 있을 것이고 재기할 것이고 끝내 성공할 것이다. 



정동 병원 지하 물리치료실에 누워. 심하게 어깨가 아프다. 유착성 관절염의 세계에 들어왔다. 



요즘 술친구가 부족하다. 결혼의 후유증이다. 이제 한 두 명 남은 듯 싶은데, 매번 부를 수도 없고 밤늦게 뜬금없이 연락하기도 ... ㅡ_ㅡ; 


 

오랜만에 서재 사진. 아이고, 이 서재는 총각 때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일세. 로또에 걸려야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정리정돈된 서재를 갖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