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음악

크세나키스Xenakis

지하련 2015. 2. 17. 00:31



하지만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며 인간의 이성적인 냉담함을 약화하는 힘으로 간주되어 왔던) 감상벽이 단숨에 가면을 벗고 증오 속에, 복수 속에, 피를 보는 승리의 환희 속에 항상 존재하는 "광포함의 상부구조"로 등장하는 순간이 (한 인간의 삶에서나 한 문명의 삶에서) 올 수 있다. 내게 음악이 감정의 폭음으로 들린 반면, 크세나키스의 곡에서 소음의 세계가 아름다움이 된 것은 바로 그런 때다. 그것은 감정의 더러움이 씻겨나간 아름다움이며 감상적인 야만이 빠진 아름다움이다. 

- 밀란 쿤데라, <<만남>>, 123쪽 









크세나키스Xenakis의 음악을 매일 같이 듣는 건 아니다. 1년에 한 번 정도, 그것도 우연히 듣기 시작해 끝까지 듣는다. 솔직히 쉽지 않다. 밀란 쿤데라의 산문 속에서 크세나키스를 읽었고, 오늘 크세나키스 음반을 꺼낸다. 두 장으로 구성된크세나키스의 음반은 Naive의 "La Collection" 시리즈 중의 하나로 출시되었다.  


두 번째 시디의 두 번째 음악은 Tetora를 듣는다.  나에게도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하는 '아방가르드의 속물 근성'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해본다. 




밀란 쿤데라는 '소음의 세계'라는 표현으로 소음에 가까운 크세나키스의 음악을 이야기하지만, 실은 일상의 소음은 그냥 시끄러울 뿐이지만, 크세나키스의 음악은 더 시끄러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쇠사슬같은 소음이랄까. 무직하고 딱딱하며 두툼하게 각이 져서 귀를 무겁게 만든다. 



올리비에 메시앙은 크세나키스의 음악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크세나키스의 음악은 이전 단계의 음악과 대립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유럽의 음악을, 유럽의 유산 전체를 우회한다. 그의 출발점은 다른 곳에 있다. 그의 출발점은 인간의 주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유리되었던 음이 내는 인위적인 소리 안이 아니라, 세상의 소리 안, 마음 속에서 분추로디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비가 내리는 소리나 공장의 왁자지껄한 소리 또는 대중의 고함소리처럼 외부로부터 우리를 향해 도달하는 '음(音)의 덩어리' 안에 있다. 

- 밀란 쿤데라, <<만남>>, 125쪽



예전엔 라디오에서 듣거나 누군가에서 빌리지 않는 이상, 듣지 못했던 음악들도 Youtube에서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편리함 속에서 정작 내 주위엔 음악 듣는 이들이 사라졌다. 어쩌면 문화는 심심함 뿐만 아니라 어떤 불편함마저 필요한 것이 아닐지. 크세나키스가 어떤 불편함 속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그래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노력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 속물적 아방가르드가 아닐까.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