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misc. - 2015년 3월 10일.

지하련 2015. 3. 10. 18:06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짬뽕을 폰 카메라로 찍기란 쉽지 않았다. 임시로 있는 사무실 근처 중화요리점에서 짬뽕에 이과두주를 마셨다. 붉은 색으로 장식된 벽면 아래 짙은 갈색 나무 무늬 테이블과 검정색 천이 씌워진 의자에 앉아, 바람과 오가는 사람들에 흔들리는 출입문을 잠시 보았다. 





이것저것, 그냥, 잠시, 보는 시절이다. 정해져 있지 않아 자유롭고 정해져 있지 않아 불안한 시절이다. 자유와 불안, 혹은 두려움은 등가적 관계를 이룬다. 최초의 인류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자유 속에 깃든, 끝없는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가지고 왔다.


하지만 중년이 되자, 자유는 보이지 않고 불안과 두려움으로만 채워졌다. 마음 속에서, 육체 속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 술로 태워지고 술로 열광하고 술로 위로받는 건 자유와 사랑, 순결과 불륜이지, 불안과 두려움은 아니었다. 





선사시대 우연히 발견되었을 술은, 인류에게 두 번째로 값진 선물이다. 그래서 나는 어김없이 짬뽕에 독주를 마신다. 싸구려 독주를. 


이과두주. 이 술은 중국 사람들에게 소주와 비슷한 술이다. 실은 소주보다 더 싼 술이다. 알코올 도수는 평균 56도. 



출처: 성학주류 홈페이지(http://www.sunghak.com/)


예전에 마셨던 이과두주는 나쁘지 않았는데, 최근에 마신 이과두주는 알콜 냄새가 심하게 났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걸까. 어느 주류 회사 홈페이지에서 가지고 온 이과두주 사진이다. 차례대로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1. 홍성이과두주(55도, 유한회사 금용 수입)

3.우란산이과두주(56도, Niu Lan Shan Er Guo Tou Jiu,100ml (주)풍원주류 수입 )

4.우란산이과두주(56도, Niu Lan Shan Er Guo Tou Jiu, 125ml (주)풍원주류 수입 )

2(?)/5. 천진식품 제조 이과두주((유한회사 금용 수입)) 



우란산이과두주를 마셨는데, 맞지 않았다. 조만간 다른 이과두주도 마셔볼 요량이다. 


십 수년 전 크리스마스 근처, 대학원 시험을 떨어지고 짬뽕 국물에 이과두주를 마시고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런데 그 때 대학원엘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때로는 떨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학문으로 유리된 세상 속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채, 고귀한 언어의 자존심만을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 때 나와 함께 술을 마시며 나를 위로해주시던 분은 계속 공부를 하셨고 지금도 공부를 하고 글을 쓰시지만, ... ...어느 방향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결국 어느 게 정답인지 모를 땐 자신이 정하는 게 정답인가. 





그리고 나는 짬뽕을 집에서 해 먹었다. 재료의 부실함으로 인해 마법의 가루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나름 선방했다. 다음 주부턴 여의도에서 프로젝트 PM을 맡기로 했다. 준비 중인 사업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해졌고, 이 지지부진과 무관하게 경제적 삶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책 읽고 음악 듣고 글을 쓰는 삶을 한 때 동경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한 것은 책 읽고 글 쓰고 공부하는 이들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 난립했던 무수한 사상들은 학문의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었지만, 지나친 학문 논쟁과 쌀 한 톨 만들지 않으면서 사사건건 중앙정부의 정책에 토를 달던 학자들이 싫었던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통일되었으나, 사상적으로는 통일되지 않았고, 통일할 생각도 없었던 셈이다. 무술이라면 싸움이라도 해서 결판을 낼 수 있었지만, 사상과 학설은 이와 같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지나, 한 무제에 와서야 유교로 사상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무언가 만들고 생산하며 기여하는 삶. 이게 좋다. 그건 사적인 차원에서 쓰여지는 글 이상이어야 한다. 무언가 생산할 수 있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글이라면 괜찮을 게다. 그런데 그런 글이 어디 쉽나. 잡글이 길어졌다.

*     *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책 <<투명사회>>를 읽기 시작했다. 결국 한병철의 책 두 세 권을 더 구입했다. 그가 한국에 있었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한국에도 한병철 교수 정도 내공이 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독일적 환경 아래에서 다른 일상을 보내며 고민했다면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글이라 여겨지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런 글을 쓰지 못한다. 아니 쓸 수 없다. 우리가 마주치는 한국 사회의 일상은 구한말 조선 시대지, 21세기 유럽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제 3 세계 한국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만의 고유한 시각, 고유한 해법, 고유한 이론이 나와야 하지만, 인문학은 이미 수입 보따리 상이 되어버렸거나, 아니면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나 또는 동양의 고전들을 들이대거나 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나는 반대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걸 늘 확인받고 싶어하고, 나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이 세상 한 명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그리고 이게 현대인이다. 한병철 교수는 <<투명사회>>에서 노출된다는 것에 대한 폭력성을 지적하지만, 우리는 노출됨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도 있음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 위안에 주목하지 않고, 왜 우리는 그 위안에 몸을 맡기게 되었는가를 묻지 않고 투명사회의 한 부분으로 지적하며 그것의 폐해만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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