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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Downsizing Democracy 

매튜 A. 크렌슨, 벤저민 긴스버그(지음), 서복경(옮김), 후마니타스 


 




 





1. 정치의 중요성 


몇 년전부터 정치에 대해서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일상의 상당 부분이 정치, 정치적 활동, 현실 정치 -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 등으로 인해 좋아지거나 나빠진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들과 그들이 만드는 모습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그만큼 중요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술자리에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일행 중 한두명은 싫어한다. 더구나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싸우기라도 하게 되면 괜히 꺼냈다는 기분과 함께 술자리마저 가지지 못하는 외톨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일상에서의 정치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이야기하고 서로의 다름은 인정하고 타협점을 찾아나가는 여러 활동들이라 여기는데 말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조차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인들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으며, 정당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세계가 있었고 우리의 세계가 있었다. (1)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도리어 나는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불현듯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가 필요했고 몇 권의 책을 샀다. 하지만 쉽진 않았다. 책 읽을 시간이 없었고 나 스스로도 둔해졌다. 그러다가 올해 봄,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구입한 지 2년 만이다.



2. 한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현재


현대 한국에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강제된 것이다. 외침(外侵)에 의해 조선 왕조가 무너졌고 그 이후 식민지 시대를 거쳐, 미군정이 지나고 미국의 영향력 아래,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정치 체제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모략과 술수, 암살 등을 거쳐 초대 대통령이, 그 이후 다양한 군사적 활동에 기반한 대통령들이 취임하고 바뀌었다. 불행하게도 진짜 민주주의 - 국민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 는 없었고 대통령들과 그의 무리들이 나라를 통치했다. 


소수의 사람들이 주장하고 다수의 대중들이 동의하듯, 이 통치에는 일견 장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건 100점 만점에 50점짜리다. 경제를 어느 정도 발전시켰으나, 정치 체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잃어버렸다. 심지어 그 경제마저도 재벌 중심으로 만들어놓은 탓에, 재벌 기업 1-2개가 무너지면 나라가 휘청거릴 판이다. 그리고 그 재벌 기업들 때문에 많은 중소기업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하청기업에 머물러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경제를 성장시켰다고? 수십 년 전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으나, 겨우 이 정도 밖에 못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뒤쳐지고 있다. 분명 그 때 우리는 성숙한 민주주의와 탄탄한 경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어떤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 때 우리가 너무 가난하고 너무 낙후되어 있었던 탓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높은 경제 성장율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리곤 그 때의 놀라운 경제 성장이 몇 명 소수의 작품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했던 경제가 무너지고 있는 건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성장했던 경제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반성은 하지 못하는 걸까? 경제적 불평등은 심해졌고 곧 인구 절벽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 젊은 세대를 위한 미래 따윈 없다. 경제 활동을 통해 창출한 부는 모두 자산 거품을 지탱하기 위해 소모된다. 즉 집값을 버티기 위해 사용된다는 말이다. 집값이 떨어지면 아예 집이 없는 젊은 세대들은 아무런 피해도 없다. 어차피 지금도 힘든데, 집값이 떨어진다고 더 힘들어질까.  


미래를 위한다면 집값은 버려야 하지만, 이 말을 했다가는 절대로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고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 



3.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Downsizing Democracy  


이 책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학 서적이다. 일종의 분석서이고 연구서적이다. 정치적 견해가 담겨 있다기 보다는 정치 제도, 정치적 활동의  변화가 현재 미국 민주주의를 악화시켰는가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대부분이다. 사회학적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 싶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민주주의 상황이 한국의 상황과 너무 유사하다는 데 있다. 2004년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인데, 2015년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라면 ... 


가령, 왜 정치엘리트들은 대중들과 소통하지 않고 다양한 이익단체들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더들과만 소통하게 되었는가,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도리어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율은 더 떨어지는가, 왜 가난의 문제를 더 심각해지고 해결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는가 등 현실 정치의 다양한 문제점들이 어떤 계기로 생겼고 악화되어 가는가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 너무 냉정해서 아주 비관적으로 읽히기까지 한다. 



4.  고객Customer이 되어버린 시민Citizen



최근 수십 년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은 시민에서 '고객customer'이라고 불리는 존재로 변해왔다. 

- 9쪽 



책 서두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현재 정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시민이라고 하면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며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면, 고객은 행정가나 정치인들의 다양한 서비스를 받으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여기에 대해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서비스 개선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애초의 기획은 많은 시민들에게 현실 정치 참여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야기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생긴다면 시민들의 의견을 보다 폭넓게 듣고 수용할 수 있으며 정책이나 정당의 정치적 활동에 반영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미국 민주주의 성숙과 다양한 민주적 제도의 신설과 운영은 미국인들을 시민에서 고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상황 변화를 면밀히 추적하며 기술하고 분석한다. 



5. 탈물질주의, 그리고 가난 


요즘 진보적인, 혹은 진보적인 척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다양한 공익 활동이나 자선 활동을 하며 환경 운동이나 인권 운동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미국 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주류 자유주의 최근 경향은 ‘탈물질주의’다. 이것은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을 인도하는 강력한 공적 이념과 짝을 이루는 민간의 이념이다. 탈물질주의는 특수 이익의 지저분한 난투극을 초월한 양, 허공에 붕 뜬 채로 삶의 질을 강화하는 데 시선을 둔다. 이때 많은 경우 경제적인 사안은 고려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고래와 야생동물 보호, 여성의 선택권 보장, 자존감의 형성, 에너지 보존, 정치 자금 제도 개혁에는 찬성하고,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 근본주의적 불관용, 해양굴착, 동성애자 배척, 총기 사용 규제 완화 로비에는 반대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지지자들은 저마다 나름의 고상한 명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명분들은 대부분 ‘고상하다’. 하지만 그것은 풍족한 사람들의 명분이다. 

- 414쪽 



약간 이상하지 않은가? 이 상황은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얼마 전 '동성애 행사'가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인권 문제도 나왔다. 환경 문제도 걸핏하면 등장하고 이주노동자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 



탈물질주의는 가난을 비껴간 시민들의 신념이다. (…) 중도좌파가 공공정책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혜택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이들은 궁핍한 환경에서 살아가며 침묵하는 시민들(빈곤층 뿐만 아니라, 제조업이 쇠락하고 고등학교 졸업장이 더 이상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지 않는 경제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노동계급 가정들)과도 멀어졌다. 

- 415쪽



진짜 한국을 절망적으로 만들고 있는 건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다. 중소기업을 다니는 월급쟁이가 성실하게 돈을 모아 서울 시내 아파트를 살 수 있을까? 이제 절대 사지 못한다. 당연히 빚을 내면 살 수 있다. 그리고 빚에 짖눌려 살다가 죽을 것이다. 부모가 빚이 있으니, 대학생이 된 자녀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 그 자녀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시작부터 갚지 못하는 빚을 안고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인권? 환경? 성적 취향의 자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진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까먹고 있다. 그건 우리 코 앞에 닥친 가난의 문제다. 죽으라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시대가 이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2) 


이 가난의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습게도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건 거의 유일하게 정치다.  



6. 국가와 국민, 혹은 시스템과 개인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



국가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국가를 위해라고? 이게 가능한 소리인가? 아마 10년 전이라면 충분히 호소력 있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5년 전이라도 약간의 호소력은 가졌을 것이다. 100조원이 넘는 돈을 자원 외교랍시고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령 100조원으로 신혼부부들을 위한 아파트나 연립 주택을 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얼마나 씁쓸한 유머인가? 이 나라 국민들은 화가 나지도 않나? 100조원이면 천 만명에 천 만원씩 줄 수 있는 돈이다. 백만명이라면 일 억원씩. 그 돈을 공중분해시켰다) 


그런데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고? 이제 그 누구도 국가를 앞세워 우리에게 호소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월호 이후 국가는 우리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국가를 위하라고? 이젠 예비군 훈련 가서도 죽는 판인데... 국가를 위하라니.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무슨 생각으로 저 말을 한 것일까? 제대로 된 민주주의에서는 정말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 저 말이, 엉망이 된 민주주의에서는 그 어떤 호소력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될 뿐이다. 


국가와 시민의 관계는 공생의 관계다. 국가는 시민에게 군사력과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시민은 국가로부터 안전과 다양한 공공서비스를 보장 받는다. 국가는 시민에게서 다양한 재화를 받기 위해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고 투자한다. 예전에는 정치적 모임이나 정당 차원에서 지원해주던 것을 개개인의 차원으로까지 낮추어 제공하기 시작했다. 



개인민주주의는 집단적 공격으로만 돌파할 수 있었던 정치의 장벽을 낮춘다. 정보의 자유, 정보공개법, 공청회 의무화, 입법 예고제와 공개 설명회 규정, 위원회 등의 ‘시민’ 대표 할당제, 공공기관의 ‘전화상담서비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복지 서비스 등 이 모든 것과 기타 정책들은 시민들이 혼자서 정치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견 상 시민 친화적으로 보이는 개인민주주의의 이런 장치들이 갖는 주된 효과는 미국에서 시민의 역할을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 43쪽 



쉽게 말해 국가가 제공해주는 서비스에 불만이 있다면, 예전에는 지역구 사무실을 찾거나 다양한 모임을 통해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처리한다. 심지어 지역구 사무실, 다양한 모임을 통해 처리되지 않는 민원이 있다면, 청와대 신문고에 올려야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니.... 이제 이 사회의 잘못된 점을 개선하기 위해 정당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 필요없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미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시민들은 스스로 시민의 역할을 버리고 고객의 태도로 여러 공공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콜센터를 통해 접수한다. 의도치 않은 결과이긴 하지만. 


애초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만든 것이지만, 도리어 정치적 무관심을 만들고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변형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당을 지지하지도 정당 사무실을 나가 정치인을 만나지도, 사람들을 모아 시위를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비슷하게 ‘정치엘리트들도 유권자를 동원하지 않고도 자신의 정책 목표를 달성할 방법을 찾았다’. 


이제 높은 투표율은 꿈과 같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제 그걸 원하지 않고, 높은 투표율 없이도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정치를 능수능란하게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고객이 된 시민들도 이제 투표하지 않는다. 투표의 효과는 거의 없고 민원 게시판의 효과는 직접적이다. 그 효과가 더 큰 것은 소송이 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고 시스템은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다. 가난은 개인이 성실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시스템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취업도 마찬가지고 결혼도 연애도 다 개인의 잘못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정말 그렇다고 믿고 있는가? 



7. 상상된 유권자와 여론조사 


시민이 사라지고 모두 고객이 된 지금, 시민, 즉 유권자는 상상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를 향해 호소하고 여론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1970년대 ‘새로운 정치’에서, 그런 상상된 유권자 집단들은 공익단체라는 형태로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 공익단체에 대한 대중의 참여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이 단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거에서 대중을 동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행정기관을 접촉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명분 아래 공익단체는 특정한 누구와도 거리를 두었다. 그 결과 한정된 유권자 집단을 동원하지 않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했다. 

- 148쪽 ~ 149쪽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민 집단을 상상적으로 구성한 것, 이것이 바로 공익단체다. 이제 실제 유권자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경우 극히 드문 이벤트가 되었다. 대신 여러 단체에 속한 소수 인원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할 뿐이다. 


상상된 유권자라는 관념은 여론 조사로 옮겨가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2억 5천만 미국인의 의견을 반영했다는 설문조사는 겨우 무작위로 추출된 응답자 2~3천명의 인터뷰 결과일 뿐이다. 나머지는 통계적으로 또는 ‘가상적으로’ 대표된다. 그들은 인터뷰의 불편함조차 견딜 필요가 없는 것이다. 

- 190쪽 



수학적으로 옳을 진 모르지만, 수학은 수학일 뿐, 우연이 지배하는 현실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라며,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정치적 의사결정을 한다. 이게 과연 옳은 것일까? 



통계학자들은 여론 조사를 ‘참견하는 측정 obtrusive measure’이라고 부른다. 여론조사는 단순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의 연속성과 변화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론조사는 개인의 의견을 모으는 방식을 정의한다. 예컨대 여론조사에서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의견 간에 비중의 차이가 없다. 또한 여론 조사자들은 여론이 판단해야 할 주제를 선택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설문 조사로 기록되는 데이터는 ‘순수한’ 여론이 아니라, 여론을 가진 사람과 여론조사자의 상호작용이다. 설문조사가 여론을 측정하는 동시에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189쪽 ~ 190쪽 



여론조사는 시민의 입장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들어주기 원하는 바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시민의 의견 가운데 듣고 싶은 것을 말해준다. 그 결과, 여론조사는 여론을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설득하는 과정의 한 단계로 자리잡는다. 여론조사는 여론 관리를 위한 도구인 것이다. 

- 195쪽 



여론조사를 통해 너무도 신중하게 걸러진 이런 가상 시민들의 견해에는, 한때 여론을 중요한 정치적 현상으로 만들었던 특징들이 빠져 있다. 강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수의 무관심한 사람들 속에 묻혀 버린다. 집단과 집단성은 개체화되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약화된다. 마침내 시민은 고객의 지위에 걸맞게, 의뢰자의 설득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도록 설계된 여론 조사의 대상이 된다. 정치적 변방에 갇힌 이들 가상의 시민은 참여하도록 초대받지 못한 채 정치투쟁을 그저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198쪽 



어느새 우리들은 우리들의 정치적 견해를 여론 조사에 기대어 생각하고 판단내리고 있다. 여론조사기관들은 경쟁적으로 다양한 여론 조사 활동을 하고 이를 보도 자료로 배포한다. 연예 가십 기사들과 경쟁하는 정치부 기자들은 보다 자극적인 여론 조사 결과를 기대하고 이를 부풀어 보도한다. 이제 상식적이고 건강한 정치적 견해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 자체부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8. 민주주의와 한국 사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개인적 차원으로 내려앉은 민주주의와 '정치동원political mobiliztion'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즉 개인민주주의로 인해 기존 정치 활동의 모습은 사라지고 건강한 민주주의 대신 정치 엘리트들과 이익단체 위주로 정치가 흘러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들로 인해 '왜 미국 민주주의가 나빠졌는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물질적 필요가 너무 중요하고 절실해서 탈물질주의를 향유할 능력이 없는, 정당이 보내는 우편 목록에조차 이름이 올라 있지 않고, 투표하지 않아도 굳이 관심 가져 주는 이가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이익집단으로부터 초대받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대표해 진행되는 집단소송의 원고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 있지 않으며, 그저 여론조사로 대표되는 가상적 시민virtual citizen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또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애국적 열정을 간직하고 있고, 이따금씩 역사에 나타나는 '열정의 순간'을 함께 하지만, 곧 부모이자 생활인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 역자 후기, 443쪽 



민주주의에 대한 책이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일 것이고 민주주의나 정치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들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라고 여긴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어려워진 것은 한국 정치 상황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그걸 아는 이들은 이미 지쳐있고, 알려고 하는 이들에겐 끊임없이 그건 거짓말이라고 세뇌시킨다. 


그러니, 가상적 시민으로만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는 자신들 탓으로 여길 것이다. 비만이 나쁜 환경으로 인해 벌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의지력 박약으로 몰고 가듯, 한국 사회는 사회 자체의 문제점으로 인해 고통받는 개인의 문제를, 그 개인의 불성실함, 그 개인의 잘못된 판단 탓으로 몰고 간다. 



* * 

글을 적고 보니, 이 책에 대한 소개인지, 현재 한국에 대한 불만을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써서 올렸는데, 너무 두서가 없어 다시 적었다. 그러나 수정해 적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레지스 드브레가 어느 인터뷰에선가, 테니스 선수처럼 매일 글쓰기를 해야 된다고 했는데, 날 두고 하는 소리같다. 일이 많아 요즘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그랬더니 서평 하나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렵게 여겨져서야 ... 큰 일이다. (어쩌면 내 스스로 정리가 덜 상태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책, 정말 좋으니, 다들 사서 읽기를 바란다. 





미주. 

(1) 한때 모든 것이 지금은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 탓이라고 하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씁쓸하기만 하다. 2015년의 한국은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무책임함으로 똘똘 뭉쳐있다. 


(2) 첫 리뷰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강남 좌파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지웠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10점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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