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여름휴가

지하련 2015. 8. 6. 00:30





고대의 유적이란, 비-현실적이다. 마치 만화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일상 속으로 들어오지만, 기억에 남지 않고 현실과는 무관하거나 반-현실적이다. 가야 시대의 고분 위로 나무 하나 없는 모습을 보면서 관리된다는 느낌보다는, 신기하게도 나무 한 그루 없구나, 원래 묘 위엔 나무가 자라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생각은 논리와 경험을 비껴나간다. 그 당시 인구수를 헤아려보며 이 고분을 만들기 위해 몇 명의 사람들이 며칠 동안 일을 했을까 생각했지만, 이 역시 현실적이지 못했다. 


자고로 현실은 돈과 직결된 것만 의미할 뿐, 나머지는 무의미했다.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20대 때 알았더라면, 나는 돈벌기에 집중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이 점에서 진화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그러나 불편하기만 한 비밀을 알려준 셈이다. 


여름휴가다. 





사람들은 바다로 들어갔지만, 해변 근처만 얼쩡거릴 뿐, 깊은 바다로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아예 걸어다녔다. 바닷물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은 좋았지만, 그건 떠있다는 기분보다는 내 눈높이로 낮은 파도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파도는 햇살을 머금고 소리를 내며 내 눈 앞까지 와서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내 눈 앞에서 사라진 것들은 참 많았다. 사라진 것들의 목록을 적고 싶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 그것들이 걸어나와 내 눈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기억되지만, 실현되지 않고 개념은 절대로 개별화될 수 없다. 






아들에게 공룡발자국을 설명해주었지만, 그에겐 너무 어렵거나 너무 낯설거나, 무서운 것이었다. 공룡은 사라졌고 흔적으로만 남았다. 가끔 우리의 영혼이 분자, 원자 따위까지 쪼개질 수 있다면, 그것들이 공기 속에서, 혹은 시간에서 서로 연결되어 사유할 수 있다면, ...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던 사이에 아들은 저 멀리 뛰어가기 시작했다. 해변을 따라 나있는 나무 산책로는 아이가 뛰기엔 다소 위험해보였고, 아마 이 사소한 위험이 그를 자극했을 것이다. 





여름휴가 때마다 도서관으로 가던 버릇은 여전해서 휴가 마지막 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원래 계획은 휴가지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지만, 그건 너무 사치스럽고 공허하기만 한 상상일 뿐이다. 


요즘 자주 내일이 두렵고 무섭다.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사십대가 되었고 사십대가 되자 무력하기만 한 나를 보고 있을 수 조차 없다. 그런데 아마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애초에 이 나라의 시스템이 잘못 설계되거나 사소한 설계 변경들이 모여 문제 해결력은 커녕, 장애 처리에서만 모든 자원이 소비되기에 이르렀다. 시스템의 문제이니,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시스템을 설계하고 도입한 자들은 이미 없고 그걸 운용하는 이들은 경험 없는 초짜들이거나 낙하산들이다. 아니면 그렇게 스스로를 포장하고 언론들이 뒷받침해준다. 언론들은 연일 정부를 비난하지만, 그 비난도 계산된 정치적 타협일 뿐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을 게다. 


여름휴가를 다녀왔고 여름휴가가 끝났다. 난생 처음 모든 이들이 가는 7월말 8월초에 휴가를 갔다왔다. 어느새 나는 지워졌고 그 자리에 가족이 자리잡고 있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 로또 한 장을 구입했는데, 5등도 되지 않았다. 뭔가 운 좋게 당첨된다면 ... 참 좋을 텐데, 아마 모든 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겠지. 실은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여 삶이 개선되거나 계단을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현대 자본주의는 그렇지 못하다. 마치 르네상스에서 중세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랄까. 소란스럽게 세속화에 열광하며 계량적 가치와 도구에 맹목적인 믿음을 가졌던 근대인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할까. 


토니 주트의 <<20세기를 생각한다>>를 휴가 내내 읽을 계획이었나, 겨우 몇 장 읽었을 뿐이다. 다만 그의 놀라운 시각은 20세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정말 많은 도움을 준다. 한국은 파시즘 국가에 가깝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파시즘의 메시지임을 알게 되었다. 파시즘 정당은 하층 계층의 미묘한 심리을 자극하여 지지를 얻고 확고한 신념이나 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태도만 공유할 뿐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정당도 여기에 속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마르크주의를 억지로 연장시키는 것일 뿐, 마르크스와는 별 관련없다. 유태인이 20세기 초 유럽에서 희생당한 것은 유태인들만의 커뮤니티를 고수하면서 정치 권력에는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 동시에 그 당시 가장 우아하고 세련된 독일어를 구사하던 그들이 도리어 희생되었다는 아이러니.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현대 이스라엘은 아주 흥미롭게 정치전략에 결부시켜서 미 유태인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분석은, 아마도 토니 주트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피곤하다. 집에 오자마자 몇 시간 낮잠을 잤고 다시 잠자리에 들 것이다. 마음은 어수선하고 내일은 무섭다. 달리기를 해야 하고 무조건 1등을 해야만 한다. 사십대에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이십대엔 몰랐다. 이제 오십대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조만간 리뷰를 써서 올리겠지만, 강력 추천한다. 일종의 20세기 지성사, 사상사가 될 법한 이 책은 20세기를 리뷰하면서 현재를 다시 읽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