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어떤 기적의 풍경

지하련 2006. 4. 27. 01:52


사무실 옆 아파트 화단에 분홍 빛깔 꽃들이 봄바람에 흔들, 흔들, 흔들거렸다. 내 마음도 흔들, 흔들, 흔들거렸다.

흔들, 흔들, 흔들거리며 집에 들어와 잠을 잤을 게다. 어쩌면 집에 들어와 울었을 지도 모르고 한바탕 난리를 피웠을 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집에 왔는지, 어떻게 술을 마셨는지 기억에 없으니 말이다. 그 날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소주를 마셨고 태어나서 그렇게 쉽게 소주가 들어가는 날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소주 몇 병을 마시고 자리를 옮겨 위스키 두 병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사무실에 나가지 못했다. 내가 술에 취해 잠을 자는 동안, 세상은 몇 번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과거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이,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걸 인정하려고도, 인정할 생각도 못했다.

잠을 자기 전 창가 블라인드를 내리는데, 요즘은 블라인드를 내린 창이 무서워서 그냥 밖에서 안이 훤히 보이게 해놓고 잠을 잔다. 그리고 꼭 새벽 3시나 4시쯤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깨었다가 다시 잠을 청한다. 실은 오래 전부터 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 인생은 소설이 아닐 것이란 생각에 믿지 않았다. 역시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사실만 인정할 뿐이었다.

같이 술잔을 기울인 두 녀석 중 한 명은 8년 간 사귄 여자 친구가 자신은 독신주의자라고 강변하는 통에 헤어졌음을 안타까웠다. 그리고 얼마 전 헤어진 1년 남짓 지난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자신의 결혼식을 알리는 전화, 반갑게 자신의 결혼식에 와줄 수 있느냐는 전화, 지난 8년간의 사랑이 악몽으로 변해버린 전화를 받아들고는 망연자실해 있었을 게다. 

다른 한 녀석은 자신을 버린 여자 때문에 제 발로 정신병원에 걸어 들어가 의사와 상담하고 약을 타 먹었다. 그리고 약을 먹고는 술집 테이블에서 울다가 졸다가, 몇 달을 그렇게 생활했다. 양가 집안 식구들이 단체로 여행을 다닐 정도로 가까웠던 그의 여자친구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결혼하겠다며 다른 남자를 데리고 왔다고 했다. 5년 넘게 만나 오면서 결혼식 날짜를 잡은 것도 한 두어 번 있을 정도였는데. 어느 날 낯선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 녀석들이 며칠 전에는 나를 위로했다.

사무실 옆 아파트 화단에 분홍 빛깔 꽃들이 봄바람에 흔들, 흔들, 흔들거렸다. 내 마음도 흔들, 흔들, 흔들거렸다.

내 사주에 서른둘에 한 번, 서른다섯에 한 번 여자 운이 있다고 했다. 서른둘에 만난 그 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내가 서른다섯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했다. 그게 우스갯소리였는지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인지 몰라도 헤어진 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그 말만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그제 그녀의 아이 얼굴을 보았다. 창원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올라오던 우등고속버스 안에서 잠을 청하던 그녀의 얼굴과 겹쳤다. 그 날 밤, 그녀의 어머니께서 딸을 시집보낸다는 생각에 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는 ‘이제 네가 싫어졌어, 그 뿐이야.’라고 말하곤 연락을 끊어버렸다. 나와 헤어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이와 결혼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남편 되는 이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 같다.

사무실 옆 아파트 화단에 분홍 빛깔 꽃들이 봄바람에 흔들, 흔들, 흔들거렸다. 올 봄 내 눈동자에 계속 꽃이 밟힌다.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이 사라지면 내 마음이 편해지려나. 얼른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고 가을 끄트머리에 서서 겨울이 오길 기다린다. 그러면 흔들, 흔들, 흔들거리는 내 마음이 얼어붙을 테니 말이다. 참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과거라 하고 언제나 내일을 향하고 있는 우리들의 발목을 잡는다 하여 과거라 부른다. 어느 봄날 내게 생겼으면 바라던 어떤 기적이 영원히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이 노래를 외워 부르려고 했는데. 그 때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