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랭보의 '삶'

지하련 2005. 1. 23. 13:19

먼지 묻은 시집 두 권을 꺼낸다. 이준오의 <<랭보 시선>>(책세상)과 김현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민음사). 두 권 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된 책이다. 이준오의 <<랭보 시선>>은 고등학교 때 샀던 걸로 기억한다. 한글로 말하자면 김현의 번역이 낫다. 그래서 오역의 비난을 받는 걸까.

랭보의 세계는 너무 심하게 오염된 세계다. 세속의 고귀한 것들에, 그의 영혼에, 버림받은 사랑에, 타인의 경멸과 증오에, 그리고 어둠의 미래를 가진 청춘에. 하지만 랭보는 그 속에서도 꼿꼿하게 서서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를 '견자의 시세계'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보면, 어른같은 어린 랭보와 어린이같은 늙은 베를렌느는 꽤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오랫만에 랭보의 시를 읽는다. 나이 스물 한 살 땐 나이 서른 쯤 되면 불어로 그냥 바로 읽겠지 하며 불어공부를 했는데, 서른셋이 되어도 불어로 읽지 못하니, 서른 다섯 쯤 되면 불어로 읽으려나 하고 기대해봐야 하나.

랭보. 지금 읽으니, 참 좋다. 슬프고 쓸쓸한 것이 내 영혼이 떠돌고 있을 겨울 대기같다.



삶 VIES


1.
오오, 신성한 나라의 거대한 가로수 길들이여, 사원의 테라스들이여! 나에게 잠언서를 설명해 준 바라문 승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당시 그쪽의 늙은이들까지도 아직 내눈에 보이고 있구나! 내 어깨에 놓인 전원과 후추투성이의 평야에 서있는 우리들의 애무의 손을, 그리고 큰 강을 향한 은(銀)과 태양의 시간들을 나는 되새긴다. - 주홍빛 비둘기 무리의 비상이 내 사고(思考)의 주변에서 울린다. - 여기 유배의 몸이 되어 나는 모든 문학 속의 극적인 걸작을 연출해야 할 한 장면을 소유해 버렸다. 나는 당신들에게 미증유의 풍요로움을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들이 찾아낸 보물의 역사를 지켜본다. 나는 예지는 혼돈만큼이나 경멸당한다. 당신들을 기다리는 망연자실 상태에 비해 나의 무(無)란 대체 무엇인가?


2.
나는 나보다 앞서온 모든 이들과는 전혀 딴판으로 찬양할 만한 발명자이다. 또한 사랑의 열쇠 같은 어떤 것을 발견한 음악가 자체이다. 지금, 담백한 하늘 거칠은 들판의 신사로서, 나는 빌어먹을 유년시절, 수업시절 또는 나막신 여행의 도착지, 논쟁들, 대여섯 차례의 독신생활 그리고 내 뛰어난 머리 때문에 친구들과 장단을 맞추지 못한 몇몇 결혼식을 회상하고 감동되려고 애쓴다. 나는 내 신적인 쾌활의 옛날 부분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이 거칠은 들판의 담백한 대기가 나의 혹독한 회의를 아주 활기차게 길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의적이 태도가 이제부터는 활용될 수 없으므로, 게다가 내가 새로운 혼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나는 매우 고약한 미치광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3.
12살 때 들어박힌 다락방에서 나는 세계를 알았고, 인간 희극을 예증했다. 지하 저장실에서 나는 역사를 배웠다. 북부의 한 도시에서 어느 축제의 밤에는, 옛 화가들의 모든 여자들을 만났다. 파리의 오래된 샛길에서는 고전학을 가르침받았다. 동방 전체에 의해 둘러싸인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나는 나의 거대한 작품을 완성했고 나의 유명한 은거생활을 보냈다. 나는 내 피를 양조(釀造)했다. 나에게 의무가 다시 부과되었다. 더 이상 그것을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실제로 무덤 저편에 있다. 하여 권한은 없다.



<1>의 번역: 이준오
<2>,<3>의 번역 :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