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나 취했노라

지하련 2005. 6. 6. 10:39

고대의 길과 근대의 길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양재역 사거리에서 강남역 사거리 사이의 길들은 곧지만, 늘 막혀 있다. 느리고 뚝뚝 끊어지는 경적 소리와 숨 넘어 가는 엔진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의 길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익히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차지만, 근대의 길엔 늘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곧지만 호흡하기 힘든 분위기로 내 삶을 옥죄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6월 3일 금요일 밤 10시. 무릎엔 아무런 상처도 없지만, 실은 영혼의 무릎에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도망가지도 못하도록 나를 몰아 붙였지만, 실은 늘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이 때까지 나온 시집의 첫 장 중에서 가장 멋지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슬픈 것은 장정일의 시집이다. 늘 도망 중이라는. 발 한 쪽을 앞으로 옮길 때마다 무수한 사람들이 밟았던 보도블록 한 번 보았고 다른 발 한 쪽을 앞으로 옮길 때마다 아무런 표정 없이 아래를 향해 있는 허공 끄트머리에 놓인 어둠을 보았다. 그렇게 흔들 의자마냥 내 고개도 한 번은 땅 바닥, 한 번은 하늘을 향해 흔들거렸다. 차라리 산뜻한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끝내 난 우아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다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꼬깃꼬깃 접힌 푸른 빛깔의 종이를 발견했다. 만 원 짜리 한 장이었다. 울컥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나한테 필요한 건 만 원이 아닌데. 만 원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내 고개를 더 많이 흔들거렸고 내 가슴은 너무 많이 답답해져 어디로 터져나갈지 몰랐다. 그러다가 내 가슴이 터져, 내 가슴 속에 가득차 있는 슬픈 빛깔들이 터져, 멀리 멀리 밤하늘 위로 올라가, 텅, 펑, 텅, 펑, 터지는 불꽃처럼, 내 영혼도, 내 육체도 흔적 없이 사라져, 텅, 펑, 텅, 펑, 반짝이다가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러기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한참을 걸어 어느 지하서점으로 들어갔다. 몇 년 만에 시집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한 때 꿈이 시인이었지만, 요새 시인들 시 쓰는 걸 보고, 그런 시 쓰는 사람들 뽑아주는 신춘 심사위원들 보고, 그런 시 쓰는 사람들에게 문학상 주는 다른 시인들, 비평가들 보면서 시집 안 읽은 지 몇 해가 지났다. 그러다가 꼬깃꼬깃 접힌 푸른 빛깔의 종이 한 장으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시집을 사기로 했다. 늘 가난하다는 시인들을 위해 시집 한 권 사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시인들의 시집엔 끝내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런 시 쓰는 사람들 시집을 사고 싶지 않았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강남 어느 지하 서점에서. 말쑥하게 차려 있는 여자들 사이에 서서, 백석의 시를 읽었다. 생의 피곤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내 가슴 한 켠을 때리기 시작했다. 생기 가득한 피곤들로 인해 나는 서있기 조차 힘들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남영동에 가서 영화를 전공한 친구와 목공예를 전공한 친구와 맥주를 마셨고 공덕동으로 가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지쳐 쓰러졌다. 쓰러진 자리에 이미 죽은 백석도 함께 누워있었다.


나 취했노라
- 노리다께 가스오에게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
나 슬픔에 취했노라
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