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윤리와 무한,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하련 2000. 9. 14. 22:06
『윤리와 무한Ethique et Infini』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필립 네모와의 대화, 양명수 역, 다산글방. 2000





분명 앞으로 펴쳐질 100년 동안 윤리, 또는 윤리학은 첨예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사유가 '존재'에서 시작되었기에 그 존재가 허무로 휩싸이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퍽퍽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는 부정되기 시작했으며 존재가 부정되기 시작하는 순간 '생의 허무(vanitas)'는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존재의 철학들(이 말이 가능하다면!)은 대학 강단에서, 먼지로 뒤덮인 책 속에서 걸어나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 철학들의 우두머리격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몇몇 명징한 말들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하고 너무나도 착한 이 사람은 타자에 대한 책임만을 말할 뿐, 자기자신에 대한 책임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책임성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성이다. 그러므로 내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성이요 얼핏 보면 나와 상관없는 것에 대한 책임성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나와 관계가 있고 내게 얼굴로 다가오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란 정말로 중요한 문구이다. 하지만 갑자기 '나'로 살아온 역사가 '나를 잊어버리고 타자만 배려하는' 역사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차이의 역사'를 증언한다면, 그래서 '타자의 배려'만을 강요한다면 그리고 레비나스가 이처럼 말하기를 계속한다면 나약하고 외롭고 지친 '나의 영혼'은 누가 돌볼 수 있는 것일까.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포스트모던의 주요 테마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는 어떤 부정만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뿐이다. '있음'으로서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

그는 '윤리의 증언은 앎이 아닌 계시'이며 '윤리란 거룩함의 요청'이라고 말한다. 그가 끝내 의지하는 곳은 '성스러운 종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철학의 어려움과 종교의 위로>이다. 왜 그는 종교로 발길을 돌릴 것일까. 이 세상은 다시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되었고 그것은 어떤 계시로 이루어진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해명을 구하고자 할 때 과거의 빛나는 철학적 영광은 이제 피바랜 청동거울로 변하고 오직 신만이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다시 중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옛 스승들이 그랬듯이 '불경'해져야 한다. 불경해져야 한다. 거친 황무지로 추방당한 존재로서 직접 맨 몸으로 세상과 대자적 위치에서 다시 존재를 세워야하는 것이다. 인생의 자그마한 위로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이 세상을 해명하는 의미에서의 종교란 고귀한 것을 추구하는 학자에게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