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하련 2024. 6. 8. 23:29

 

서사의 위기 

한병철(지음), 최지수(옮김), 다산북스 

 

 

정보, 이야기, 스토리텔링, 서사 등에 대해 논하는 이 책은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현대, 디지털 세계가 숨기고 있는 의미를 묻는다.

 

실제로는 자기 묘사에 다름이 없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있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궁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정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주목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121쪽) 

 

물론 여기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동의하더라도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대체로 한병철의 책들 대부분은 어둡고 우울하다.

 

다행이다. 우리가 어떻게 상처입고 무너지고 몰락하는가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탈정치화, 탈역사화가 얼마나 절망적인 풍경인가를 한병철의 책들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 모토는 이미 수십년 전에 나왔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책에서도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고 지적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이제서야라도 그것에 대한 반성이 나오고 있으니까.  

 

짧고 간결한 이 책은 꼼꼼하게 한 번 읽으면, 그 여운이 상당히 오래 지속된다. 우리들은 한병철의 견해대로 서사를 잃어버린 채, 고립되어 뜻모를 소비만 하다가 죽을 것이다.  우리 눈 앞에서 꿈처럼 펼쳐지는 스토리텔링의 세계는 무시무시한 절망만을 안겨줄 뿐인데, 그것을 아는 이는 드물기만 하다.  

 

넷플릭스의 시대에는 아무도 영화와 관련해 충격의 경험을 말하지 않는다. 넷플릭스 시리즈는 강조된 삶의 위험에 상응하는 예술 형식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빈지뷰잉Binge Watching, 즉 생각없이 시청이 시리즈 소비를 특징짓는다. 관찰자는 마치 소비 가축처럼 살찌워진다. 빈지뷰잉은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의 지각 양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97쪽)

 

그래서 넷플릭스를 끊어야 할까? 넷플릭스가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인가? 글쎄다. 전체적으로 현대의 문화나 양식은 우리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서사를 없애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왜 넷플릭스에 빠져 그 세계 속에 잠겨 멍하니 정주행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묻지 않는다. 도리어 서로들에게 어떤 시리즈를 보았는지 물을 뿐이다. 중세의 가을은 빛나는 바로크를 불러 들였지만, 근대의 가을은 우주의 무한함을 제대로 깨닫게 하면서 디지털 세계 속으로 다시 고립되어 스스로를 부정하며 홀로 지내게 될 쓸쓸한 겨울을 불러들이고 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서사, 즉 이야기에 내재해 있는 전승적 지식은,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일단 지식은 '멀리서' 온다. 이러한 원격성은 지식의 본질적 특성이다. 또한 원격성의 점진적 해체는 근대의 특징이다. 원격성은 무간격성에 자리를 내주며 점차 사라져 간다. 정보란 모든 것을 가용범위에 두는 이러한 무간격성의 자연적 발현이다.(14쪽)

 

"정보는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만 살아있다. 오로지 순간의 시점에 사로잡히며 정보 그 자체에 대해 설명할 시간은 없다." - 발터 벤야민 (14쪽)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는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녀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정보는 완전히 다른 시간을 보인다. 정보는 좁은 최신성의 폭 때문에 매우 빠르게 소진된다. 정보는 오로지 찰나의 순간에만 작동한다. (19쪽)   

 

한병철은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정보와 다른 '이야기.' 그러나 헤로도토스를 인용하면서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벤야민을 언급하며, 

 

벤야민은 이야기의 몰락을 알리는 최초의 징후가 근대 초기 소설이 등장했을 때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야기는 경험을 먹고 자라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이야기의 서술자는 이야기할 내용을 경험에서 얻는다. 직접적 경험일 수도, 들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는 자신의 그러한 경험을 다시금 듣는 사람의 경험으로 만든다." 이야기는 그 안에 든 풍부한 경험과 지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준다. 반면, 소설은 고독과 고립에 처한 개인이 낳은 산물이다. 심리분석이 포함된, 그리고 해석이 곁들여진 소설과 달리 이야기는 서술적이다. "특이한 것, 놀라운 것을 최대한 정확성으로는 서술하면서도 사건의 심리적 맥락을 독자들에게 주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몰락시킨 것은 소설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 정보다. (19쪽) 

 

이제 우리는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맥락을 잃어버린 정보들은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은 무수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지만, 디지털 세계 속엔 이야기는 없고 정보만 난무하고, 그 정보들은 이제 일상마저 조각내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야기를 할 때는 이완의 상태가 필요하다. 벤야민은 정신적 이완의 절정을 위해 지루함을 강화한다. 이 지루함은 '경험의 알을 부화시키는 꿈의 새'로 꿈꿀 때 몸을 휘감는, 안쪽은 작열하듯 화려한 비단 안감이 둘러쳐진 따뜻한 회색의 천'이다. 그러나 신문이라는 종이의 숲에서 나는 바스락대는 정보 소음은 꿈의 새를 쫓아낸다. 이 숲에서는 '더 이상 이야기의 짜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정보만이 자극의 형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21쪽)

 

디지털로 된 종이의 숲인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가 없다. 정보 사냥꾼들이 꿈의 새를 사냥하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과잉활동성 안에서 우리는 결코 깊은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정보 사회는 정신적 고도 긴장의 시대를 열고 있다. 정보의 본질이 다름 아닌 놀라움의 자극이기 때문이다.(22쪽)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는 세계가 지금 여기다. 그런데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걱정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야기의 부재를 순간순간 흘러가는 정보들이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야기의 부재를 깨닫지 못한 채, 그 부재를 채우기 위해 탐욕적으로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청자에게 조언을 주는' 사람이다. 조언은 문제에 대한 단순한 해결책만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조언은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면 좋을지에 대한 제안이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뿐 아니라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하나의 이야기 공동체에 속한 셈이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조언은 이야기를 맥락이 되는 그 사람의 일상에서 탐색되고 얻어진다. 조언은 지혜로서 '삶의 구조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로는 이야기로서의 삶에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삶이 더 이상 이야기될 수 없게 되면 그 안의 지혜도 소멸한다. 그리고 지혜가 사라진 자리는 문제 해결의 기술이 대체한다. 지혜는 이야기되는 진리다. '이야기하기 예술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진리의 서사적 측면인 지혜가 사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30쪽)

 

결국 우리들은 게오그르 뷔히너Georg Buchner의 말대로 꼭두가시 인형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줄에 묶여 알려지 않은 위력에 끌려다니는 꼭두가시 인형이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 게오르그 뷔히너 (25쪽)

 

이미 우리들은 디지털 세계 속에 중독된 인형이 되었다. 한순간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못하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다. 이제 서사 구조를 가진 이야기는 없고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정보만을 수집하고 즐긴다.

 

미래와 진보의 서사를 가지고 다른 삶의 형식을 향한 갈망을 품었던 근대와 달리, 후기 근대는 새로운 것 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해당하는 혁명적 파토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후기 근대에는 출발 직전의 분위기가 없다. '계속 그렇게 하기'와 대안 상실로 힘이 빠져 있다. 이야기할 용기, 세상을 바꾸는 서사를 향한 용기를 상실했다. (36쪽)

 

한병철은 계속 현대, 후기 근대, 디지털 세계를 비난한다. 읽는 독자는 순간순간마다 뜨금뜨금하게 된다. 내가 지금 소비하는 디지털 매체가 그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나 다시 되묻는다. 정말 그러한가.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탈진한 후기 근대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강조된 '초심자의 기분'이 낯설다. 후기 근대인은 어떤 것도 '신봉'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히 편히 쉴 곳만 찾는다. 어떠한 서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편리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된다. 후기 근대에는 어떠한 갈망도, 비전도, 먼 것도 빠져 있다. 따라서 후기 근대는 아우라가 없는 상태, 즉 미래가 없는 상태다. (37쪽)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지! 그러나 한병철은 그것은 '스토리셀링'이라고 단언한다.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게 바로 데이터 기록과의 차이다. 디지털 저장소가 첨가적이고 누적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한다. 이야기는 사건의 선택과 연결에 기반한다. 즉,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이 서사의 길은 좁다. 선택된 사건만이 이야기에 동원된다. 이야기된, 또는 기억된 삶은 필연적으로 그 사이사이에 틈이 존재한다. 반면 디지털 플랫폼은 빈틈없는 삶의 기록화에 관심이 있다. 덜 이야기될수록 더 많은 데이터와 정보가 생성된다.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데이터가 이야기보다 더 가치 있다. 서사적 성찰은 요구되지 않는다.(48-49쪽)

 

이제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삶은 의미를 상실한다. 매일매일 새로운 정보로 갱신되는 일상 앞에서 과거의 서사는 의미가 없다. 빅데이터로 분석된 내 일상은 내일도 예측할 수 있다. 최신의 마케팅 기술들은 이를 위해 설계되고 고안된다. 소비하는 나만 있을 뿐, 이야기로 채워진 나는 없다. 

 

자신이 그저 노는 중일 뿐이라고만 믿는 포노 사피엔스는 실제로는 완전히 착취당하고 제어당하고 있는 것이다. 놀이터로서의 스마트폰은 디지털 파놉티콘임이 드러났다. (50쪽)

 

그냥 이런 착각 속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은데 말이다. 착취당하고 제어당해도 그것이 노는 것이라면.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을 이야기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주목한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체험한 것의 빠짐없는 재현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서나 프로토콜에 불과하다. 이야기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 사회는 이야기와 기억의 종말을 의미한다. 어떤 이야기도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것은 정보와 데이터 뿐이다. (54쪽) 

 

하지만 아무리 이야기하더라도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반성할 필요도 없다. 실은 하루하루가 전쟁터이며 지옥인 이 곳에서 스마트폰이 선사하는 달콤한 포르노그라피적 세계는 키취적이긴 하나,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진정한 위안이 될 수 없고 우리의 삶은 더욱 궁지로 몰아갈 뿐이다. 손쉬운 해결을 위해 복용한 항생제 한 알들이 모여 우리 몸에 돌이킬 수 없는 취약점을 만들 듯이.

 

서사의 위기인 근대의 실존적 위기는 삶과 이야기가 산산이 와해된다는 데서 발발한다. (60쪽)

 

이야기하기 능력의 상실은 세계의 탈신비화에 책임이 있다. 탈신비화란 다음 문장으로 정리된다. "사물은 존재하나 침묵한다." 즉 사물들에게서 신비로움이 사라진 것이다. 단순히 '눈 앞의 존재'를 이루는 날것의 현사실성은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현사실성과 서사성은 상호 배타적이다. 

세계가 탈신비화되면 모든 세계관계가 인과성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인과성은 여러 관계성 형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인과성으로 설명하는 전체화는 '세계 빈곤'과 경험 빈곤을 초래한다. 사물이 인과관계를 벗어나 서로 관계를 맺고 비밀을 교환하는 세계는 신비롭다. 신비롭거나 시적인 세계관계는 인간과 사물이 깊은 공감으로 연결된 관계다. (78쪽)

  

우리는 이미 세계 곳곳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의 항공사진을 볼 수 있으며, 궁금한 것이 생기면 검색하면 그것의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찾기도 귀찮으면 Chat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면 된다. 이것이 가져오는 편리함 뒤로 따라오는 실존적 위기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왜 혼자라는 느낌이 드는지, 왜 쓸쓸한지, 왜 나만 잘 살지 못하는 듯한 기분의 시작점엔 디지털 세계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또다른 미궁에 빠질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도대체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병철의 책을 읽으라고?

 

이야기는 빛과 그림자,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유희다. 투명성은 모든 이야기에 근거하는 이러한 변증법적 긴장을 없애버린다. 세계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는 기존 막스 베버Max Weber가 과학을 통한 이성화로 일으킨 과학적 탈신비화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투명성이 오늘날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식이다.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함으로써 탈신비화한다. (85쪽) 

 

저 끔찍한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다. 아니 투명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음흉한 계획을 숨긴다. 모든 것을 자본의 볼모로 만들고 착취한다. 새로운 형태의 테일러리즘이다. 도구적 이성의 끝판왕이다. 하이데거는 "도구: 도끼, 주전자 또는 신발, 용도성은 이 존재자Seiende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노려보고, 그럼으로써 현전하고 존재하는 기초관계성이다"(96쪽)라고 말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보며, 동시에 상대방은 우리를 바라보며 사회를 이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그런 사회는 없다. 타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담론화하던 후기 근대는 동시에 디지털화를 통해 타자의 소멸을 일으키며 나르시시즘을 불러들인다. 

 

시선의 소멸은 늘어나는 지각의 나르시시즘화로 이어진다. 나르시시즘은 허구의 이미지를 위해 시선, 즉 타자를 제거한다. 스마트폰은 타자의 추방을 가속화한다. (...) 디지털은 현실을 해체하고, 공동체적 가치와 규범을 체화시키는 모든 상징을 허구의 것을 위해 점차 사라지게 한다.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침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96쪽)

 

이 짧고 강렬한 책은 후기 근대 - 디지털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서사의 위기를 다루며 우리가 처한 절망적 현실을 깨닫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한병철의 주장은 섣부른 판단이며 너무 과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너무 앞서간 걱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너무 빠른 변화에 열광한 나머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미덕을 잊고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다시 되새기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디지털 세계가 우리에게 미치는 부정적 측면을 상당히 시사적으로, 또한 인문학적으로 언급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거대 데이터 시대에 성장한 구글 같은 기업들은 굳이 불만족스러운 모델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사실 모델 자체를 유지할 필요도 없다." 그(크리스 앤더슨)의 말에 따르면, 데이터 기반 심리학 또는 사회학은 인간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론은 직접적인 데이터 비교로 대체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것이 되었다. 분류체계, 온톨로지, 심리학마저 전부 잊어라. 인간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냥 하는 것뿐이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전례없는 정확도로 추적해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숫자가 알아서 말해줄 것이다."(101쪽 - 102쪽)  

 

'어째서Wieso'가 '개념이 결여된 그것이 그렇다 Es-ist-so'로 완전히 대체된다. (102쪽)

 

이제 우리는 배경과 맥락을 잃어버리고 순간의 정보들로만 채워지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세계가 가져다주는 풍요 속에 숨겨진 뜻을 찾고 그것이 가지는 위험을 인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어김없이 등장하는 경제의 논리는 우리를 쉴틈없는 경쟁의 피로사회, 투명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디지털 세계도 마찬가지다. 이런 면에서 한병철의 책들은 상당한 의미와 시사점을 지닌다. 이번 책도 그러한 의미에서 꽤 의미 있는 독서를 나에게 선사하였다. 추천한다. 

 

 

한병철, 2023년

출처: https://english.elpais.com/culture/2023-10-08/byung-chul-han-the-philosopher-who-lives-life-backwards-we-believe-were-free-but-were-the-sexual-organs-of-capita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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