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Behind Innocence, 갤러리 현대

지하련 2007. 2. 19. 11:01

Behind Innocence
February 7-25, 2007
갤러리 현대
(* 저작권 관계 상 본 블로그에 있었던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를 삭제합니다. 작품 이미지는http://www.galleryhyundai.com/new/kr/exhibitions/past73_1.htm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본 웹사이트는 개인 블로그이며, 올라와 있는 작품 이미지는 비영리적 목적입니다. 하지만 저작권을 득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저작권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 언제든지 삭제할 수 있습니다.)

1. 젊다는 것.

젊다는 건 뭘까. 이 물음 앞에서 언제나, 늘 머뭇거린다, 머뭇거렸다.

1994년, 창원, 지방 도시의 거친 먼지를 먹고 자란, 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에서 나와, 뽀얀 내 손을 잡고 가던 그녀의 찬 손,가락,마디,마디,에서 흘러나오던, 이미 늙어버린 스물 하나의 슬픈 노래 소리. 그 때, 1994년의 추운 겨울 어느 날 새벽.

젊음이란, 적도, 벗도 존재하지 않는, 낙후된 회색 빛깔 지대. 연인은 존재할 수도 없을 건조한 대기로 가득 차 있는 그 곳. 희망도 없이, 절망도 없이, 그저 단조로운 우울함만, 밝게 부서지는 오후 햇살들의 자위행위에 묻어나오던 시절. 차라리 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면, 그로 말미암은 적개심으로 나는 이렇게 쉽게 늙지는 않았을 텐데.

2007년 늦겨울 어느 날, 미혼의 서른 중반 나이로, 창원을 향하기 몇 시간 전. 갤러리 현대에 들려 전시 하나를 본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익숙한 젊음.들.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자연스레 터져 나온 웃음, 또는 울음. 하지만 내가 웃는 동안, 내가 우는 동안,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들, 그녀들을 쫓아내고 난 다음이었거나, 그들, 그녀들이 오기 전 어떤 시공간. 나에게 젊다는 건 이미 지났거나, 아직 오지 않은 어떤 시절인 셈이었다. 그건 공상의 세계이며, 거울 속 공간이며, 유치한 사랑고백이거나 늙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아무 의미 없이 가상의 몸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이들의 세계였다.


2. Norbert Bisky - 달려라, 투명한 대기 속을.

밝고 투명한 Bisky의 세계는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젊음의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그린 얼굴들은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말을 건넬 것 같은 표정으로 햇살이 밝게 비치는 대기 속을 뛰어놀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젊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몰입은 그로 하여금 어떤 세계관, 어떤 철학의 구현이 아니라 감각적인 기교와 색채로서 표현되도록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순결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사랑하던, 사랑하지 않던,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이성과의 첫 키스가 언제나 매혹적이듯이, 그 매혹의 순간에만 몰입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면, 바로 Bisky의 세계인 것이다.


3. Anthony Goicolea - 순결한 자위

오래된 숲속. 미끈하게 생긴 소년들. 여름 정장에서 흰 셔츠. 목화를 수확하고 양털을 깎고 오징어를 잡아 먹물을 따로 모아 염색을 하고, 강 아래편으로 세 명의 소년이 떠나고 한 명의 소년이 관 속으로 들어가고 한 명의 소년은 관 위에 올라가 강을 따라 내려가고 떠나간 세 소년과 한 명의 소년이 서로 엇갈리면서 만나고.

Goicolea의 사진 작품들은 그의 ‘The Septemberists’라는 30분짜리 필름 속에서 가져온 작품들이다.(*) 모노톤의 필름은 이쁘게 생긴 소년들이 잠에서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비밀스러운 예식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모든 하나하나의 장면마다 어떤 설명들을 갖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장면 장면마다 비현실성, 은유, 상징을 드러낸다. 젊은 소년들로 이루어진 이 필름 속 세계는 제의적인 (동)성애로 가득하고 이미 사라져버린 어떤 젊음, 또는 지금 있는 젊음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어떤 열망을 다룬 듯 보인다. 젊음의 나르시시즘은 밝은 햇살 아래 부서지고야 말, 제의적인 열망을 닮아가고 있었다.

4. Martin Maloney - 순수하고 아름다운 유치(幼稚)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그에게 관심을 가져줄 가능성은 이미 제로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그가 관심을 가진다는 건 불공평한 일이다. 그럴 바에는 좀 더 솔직해지고 좀 더 자유분방해지며 훨씬 더 뻔뻔스러워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21세기형 청춘이 추구할 만한 태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Maloney의 세계다.

솔직히 그의 그림은 아무나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아무렇게 그려진 듯이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나간다. 다행스럽게 그가 보는 세계는 혼란스럽지 않다. 그의 유치함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에만 열중하며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몰입하는 그의 정직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어쩌면 이것은 현대 영국 미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소심해 보이지만, 그 작은 세계 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아나가는 적극성을 보일 때, 그만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5. 젊음, 그건 이미 부서진 거울.

하지만 이미 젊음 뒤의 어둠이 내리고 그들, 그녀들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 젊음은 상상으로 존재하는 것.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 갤러리 안에만 있을 수 있는 것. 술잔 속에만 있는 것. 찢어진 연애편지 같은 낡은 시집 속에만 있는 것. 그래서 이젠 존재하지 않는 것들. 그러니 이제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어떤 것.들.


* 뉴욕의 패션디자이너 톰 브라운의 협력 아래 제작된 이 필름은, 등장하는 모든 남자 배우들이 실제 패션모델이며 이들이 입은 옷들 모두 올 봄/여름 남성컬렉션 발표를 위해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