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하련 2007. 1. 22. 16:33
피아노 치는 여자 (반양장) - 10점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문학동네


피아노 치는 여자 Die Klavierspielerin, 엘프리데 옐리네크 Elfriede Jelinek (지음), 이병애(옮김), 문학동네




길을 가다가 그녀를 만났다. 몇 해 전 봄날이었는데, 그가 나에게 먼저 자신의 피아노선생이라며, 그녀를 소개시켜주었다. 에리카 코후트. 그녀의 이름이다. 나르시시즘 연구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하인츠 코후트와는 어떤 관계냐고 묻고 싶었지만, ‘당신, 혹시 지독한 나르시스트 아닌가요?’라는 질문의 빌미가 되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생각에 그건 묻지 않았다.

삼십대 후반의 그녀는 어딘가 낯설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한때 대단한 예술가적 재능을 인정받다가, 그저 그런 예술 선생, 또는 예술과 관련된 직업으로 내려앉게 되는 이들에게서 종종 풍겨오는 그런 느낌으로 치부해 버렸다. 젊은 공대생인 그는 그녀를 사랑스런 눈길로 쳐다보며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자리 잡은, 그녀를 자신의 성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눈치 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젊은 아가씨보다 삼십대 후반의 여자가 풍부한 성적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으며, 그도 그녀에게 그러한 것을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의 일상,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치료할 수 없는, 치료되기에는 이미 깊이 무너져버린 정신적 상처의 규모에 놀라, 슬퍼하기보다는 도리어 허겁지겁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을 내 기억으로부터 지워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 에리카는 부재하는 아버지의 대리인이자, 어머니의 팔루스(남근)이었다. 이러한 관계의 고착 속에서 그녀는 정상적인 정신의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환상적인 혼동 속에 갇히고 만다. 그녀는 성인이면서 어린 아이이고 어린 아이이면서 성인이고(어머니의 파트너), 여성이면서 남성이고(어머니와 침대를 나눔), 남자이면서 여성인 어떤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1) 이러한 비정상적인 배경은 그녀의 주변을 심하게 일그러뜨린다. 그녀의 사연을 소설로 엮어낸 옐리네크 여사의 표현들은 그녀가 갇혀 지내던 그 비정상적 영혼의 공간을 매우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 에리카가 이름을 바꾼 채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들의 정신적 아픔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면, 우리의 정신은 너무 효율적이어서 자신의 망가진 부분들을 그 내부 속에서 치료하고 봉합해버린다. 정신과 의사들의 소견으로는 잘못된 치료이고 봉합이겠지만. 그리고 모나드처럼 그 어떤 출구도, 창도 만들지 않은 채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 그 아픔을 숨겨버린다. 우리들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근사한 사랑에의 모험은 언제나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하지만, 이미 닫혀져 출구마저 온데간데없는 우리의 영혼은 그 설레임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흔들리겠지만, 그 뿐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 누구의 손길도 받아주지 못한 채, 이룰 수 없는 사랑에의 열망만으로 가득 차, 슬퍼하며 혼자 서있는다. 그리고 서로의 영혼을 설레게 했던 이들은 이제 사랑의 열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슬픔으로 서로의 열리지 않는, 열 수도 없는, 그 닫힌 마음을 마주보며, 서로를 할퀴고 헐뜯는다.

에리카와 그녀 어머니의 관계 속으로 그가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가 속한 세계와 그녀가 속한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를 비추는 태양과 에리카를 비추는 태양, 그리고 그녀 어머니를 비추는 태양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는 사람 숫자와 똑같은 수의 태양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거대한 일반 이론이란, 메마른 사막의 신기루이며 ‘우리는 같은 하늘에 있어’ 따위의 말은 늘 착각에 빠져 사는 바람둥이의 대사이며, 거의 모든 이들이 사랑을 나누기도 전부터 사랑의 파국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게 되는 것이다.

내가 발터 클레머였더라면, 그녀에게 매혹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녀를 나의 소유물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허접스러운 모험을 벌리기엔 난 이미 그때 마음의 견고한 성채를 구축하고 있었다). 에리카에게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해주지 못했으며(이미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도리어 그녀의 비극적 상황을 더욱 고착화시켜버렸다. 그녀처럼 우리의 일상은 조금씩 조금씩 비극적인 상황으로 고착화되어 간다. 아무도 우리의 상처 입은 정신을 어루만져 줄 수 없으며, 과거 우리 정신의, 영혼의 깊은 상처를 위안 받고자 한 모든 시도들이 비극적 파국으로 끝났음을 실제로 경험했거나, 이미 여러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후, 우리들은 우리의 상처 입은 영혼의, 정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견고한 사회적 가면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잠들기 전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그 가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이제 그저 이렇게 살아가기만 하면 될 뿐이다. 조용히, 평온하게, 나의 태양을 쐴 수 있는 토요일 오후의 고요처럼. 그렇게 흘러가다 죽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1)박희경(성균관대)의 논문 ‘독일 현대 여성 소설에 나타난 모녀관계-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치는 여자‘를 중심으로’를 참조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