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집착, 장식, 그리고 내 안의 우주

지하련 1999. 7. 6. 10:30

1.

사랑하는 이가 어느 순간 결별을 선언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 가령 그 사랑이 자신에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을 때, 그래서 그 사랑을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자신의 육체에, 자신의 영혼에 어떤 상처를 입는다고 했을 때, 그런 경우에 그 사랑이 어디론가 사라진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만 할까?

아마 많은 청춘남녀들이 떠나가는 사랑을 향해 돌아오라고 안쓰러운 손짓을 하고 절규하고 몸부림칠 것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위와 같은 경우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녀, 혹은 그가 귀가하는 무렵 길모퉁이에 기대고 사랑하는 이에게 한 번이라도 더, 무슨 일이 생기기 전까지 계속 매달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때, 떠나간 이가 우리에게 하는 말. "넌 날 사랑하지 않아. 단지 집착할 뿐이지."

집착? 사랑이 아니라 집착... ...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말이 딱딱하고 건조한 허공을 가르고 있는 동안 과거 우리 사랑은 철부지 젊음의 사소한 불장난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내 사랑은 얼빠진 청춘의 정신나간 집착이 되어버린다. 이래도 계속 사랑에 목을 맨다면 그건 자신의 영혼을 사랑이라는 허상에 쏟아 붓는 행위이며 이 순간부터 자신의 사랑은 정말 '집착'이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집착'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일까?

2.

한때 세상은 하나이고 그 하나인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깨지기 시작한 시기가 19세기 후반기였다. 이 당시 유행했던 것은 실증주의와 더불어 데카당이었고 인상주의였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 그건 꼭 한 사랑이 떠나갔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 사랑은 거짓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사랑을 기다린다는 희망에 들뜬 사람들과 사랑했던 한 사람이 자신 곁을 떠나갔기 때문에 이제 자신을 사랑해줄 이는 그 누구도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이는 사람들로 구성된 듯해 보였다.

이 당시 소설가 토마스 하디는 "우리는 우주의 법칙과 본성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존재한다는 것이 온통 더욱 소름끼치는 일이며 더욱 무의미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라고 쓰고 있다. 드디어 그 누구도 자신 앞에 서 있는 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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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엥 대성당, 끌로드 모네, 1894.


인상주의자들은 우리들의 세계가 아닌 나 안의 세계에 주목한 최초의 화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을 파악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른 사물이 된다는 점을 명백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대상들은 이제 부드러운 색들로 잘게 부서지기 시작하며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고 원근을 상실하고 우리가 흔히 바라보는 세상이 아닌 어떤 한 순간, 그 순간 자체의 세상 속에 위치하게 된다. 이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 과연 나는 그녀, 혹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던가 하는 자기 반문 같은 행위이다. 이 자기 반문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고 난 그녀, 혹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던가로 이어진다. 이 순간 그것이 사랑이었든, 집착이었든 상관 없어지고 그저 대상과 일정 순간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즉 20세기를 풍미하게 될 지적인 미술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한 번 사랑에게 배신당한 이들이 취하게 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자신의 내부 속으로 그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인상주의 작품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평면화는 이와 비슷한 심리적 배경을 깔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제 사랑하는 이가 새로 생기더라도 놀라지 않으며 과도한 관심을 쏟지 않고 적당하게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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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GRADA FAMILIA, 안토니오 가우디, 스페인 바르셀로나.

그러나 과연 우리는 사랑을 그렇게 쉽게 단념할 수 있을까. 안토니오 가우디의, 아직도 공사 중인 저 놀라운 건물은 19세기 말 아르누보가 어떤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몇몇 사람들이 사랑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 새롭게 나타나는 사랑에게 과도한 관심과 지나친 기대를 하듯이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꼭 그러한 몇몇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꼭 사랑하는 이의 손가락 하나 하나의 움직임을 행복한 눈길로 바라보고 머리카락 하나 하나에까지 사랑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모습 말이다. 실제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그랬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단지 그가 보여준 저 장식에의 집착은 사랑을 잃어버린 이들이 보여주는 지나친 관심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즉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매달리는 몸부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사랑은 무엇이고 집착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