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애서광 이야기

지하련 2006. 10. 7. 11:39
애서광 이야기 - 10점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이민정 옮김/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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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광 이야기, 플로베르, 범우문고192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책을 사서 모으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애서가, 독서가, 수서가, 장서가라고 한다. 그 정도가 심하면 책벌레(書蟲), 서치(書癡), 서광(書狂), 서음(書淫), 서선(書仙)이라고도 한다. 이들 수서가(蒐書家)들에게는 책을 사 모으는 일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책을 위해서라면 더위와 추위 따위는 상관없다. 무언가 진귀한 책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천리길도 멀다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3편 글 모두 책에 미친 사람(愛書狂)들의 이야기다.
- 이상보, ‘작품해설’, 11쪽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과 책 자체를 좋아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행위는 높이 사줄만 하지만, 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하나의 수집 행위이며 책 속에 담긴 지식이나 지혜를 탐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책을 읽는 행위, 또한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나누어지겠지만, 책을 사서 모은다는 것에 매혹되고 그것이 높이 평가되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구하기 어려운 책이란 있기 마련이고 어렵게 구해서라도 읽고 싶은 책도 있다.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선 구할 수 없지만, 그 책을 읽은 이들 사이에서는 그 책의 깊이나 감동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읽지 못한 이들에게 강렬한 수집의 욕구, 반드시 구해 읽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론 애서광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적어도 ‘유명 저술가들의 원고나 서명본, 초판본과 한정본, 진본, 기서(奇書)와 호화본, 절판본과 금서본(禁書本), 즉 희귀본들을 소장하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탐내며 노리는 책의 사냥꾼’(이광주, ‘안티쿠스’ 9-10월호, 23쪽)이야말로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작은 문고판 속에 담긴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애서광의 실체를 잘 알 수 있다. 옥타브 유잔느의 ‘시지스몬의 유산’은 애서광을 매우 잘 드러내 주는 소설이다.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애서광 이야기’는 15세의 플로베르가 써 더 흥미를 끄는 소설이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보이지 않는 수집품’은 이 책에 실린 소설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며 수집의 행위가 가지는 매혹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앞의 두 소설은 그저 애서광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가졌다는 것뿐이지만, 츠바이크의 소설은 제대로 된 안목과 식견을 갖춘 노(老)수집가의 행복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가르쳐준다.

삼치(三癡)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삼치는 남에게 책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바보요, 남에게 책을 빌려주는 것도 바보요, 남에게 빌려온 책을 돌려주는 것도 바보라는 말이다. 프랑스 속담에 ‘여자와 책과 말은 빌려 줄 게 못 된다’는 말이 있으며, ‘책에 미치면 사랑하던 첩과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실제 중국 명나라 때 주대소(侏大韶)라는 사람은 송판으로 된 ‘후한서(後漢書)’를 보고 그 책을 구하기 위해 애첩을 내주었다. 하지만 애첩은 ‘본의 아니게 이 집을 떠나가지만, 그 옛날 애첩을 말과 바꿨다는 얘기보다는 낫겠지. 언젠가 재회하더라도 후회 마시기를. 무심한 봄바람 길가 나뭇가리를 불어대네’라는 시 한 수를 벽에다 써 붙여놓고 떠났으며 이를 본 주대소는 상심 끝에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책이란 우리에게 무얼까. 하고 많은 수집벽들 중에서 책에 관한 수집벽이 우리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는 무얼까. 남북조시대의 대 학자 안지추는 자손에게 남긴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 ‘만약 언제나 책 수백 권을 잘 소장한다면 언제까지라도 소인(小人)은 면할 수 있으리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는 경험 상 이 세상이 책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책 읽기를 강요하는 걸까. 그리고 장서에 대한 필요까지 이야기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