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위대한 회화의 시대 - 렘브란트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지하련 2003. 9. 11. 16:21

위대한 회화의 시대 - 렘브란트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The Age of Rembrandt - 17th Century Dutch Painting




“이번 전시는 네덜란드의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에서 대여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이 미술관의 소장품은 비록 1천여점에 불과하지만, 렘브란트, 베르미르, 루벤스, 반 다이크 등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유럽의 손꼽히는 미술관이다. 작품의 수준에 걸맞는 작품관리와 보존의 원칙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그림 수송과정으로 이어졌다. 또한 조도 역시 회화 전시의 통상적인 기준보다 더 낮은 150룩스 이하로 설정되었고 온도와 습도는 하루 24시간 내내 체크되어 매우 헤이그로 보고되고 있다.”
- Art in Culture, 2003.9. 64쪽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일까. 이 전시를 보고 난 사람들 대부분은 교과서에 봤던 그림들을 실제로 보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실은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클래식을 듣지 않는 이가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듣고 낯설어하는 것처럼, 미술사에 대한 지식 없이 이 전시를 보고 소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학생들과 어린 아이들에게 교육적 효과가 얼마나 있을까 싶다. 나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보다 더 한국 사회, 한국 사람들의 삶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표현하는 한국 예술가들의 전시에는 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꼭 명품을 소비하는 것처럼 명화를 소비하려 몰려드는 것일까? 상상 이상으로 몰려든 관람객들은 언제나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을 탈출해 어떤 감흥, 또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이 전시 관람은 썩 좋은 선택이 되지 못한다. 왜냐면 지금으로부터 몇 백년 전의 감수성으로 돌아가 네덜란드 사람이 되지 않는 다음에서야, 이 작품들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일정 시간 이상의 학습이 필요하다. 이 전시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키워드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바로크의 정신


아놀드 하우저의 견해대로 바로크는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겠다. 궁정적 바로크와 시민적 바로크. 하나는 카톨릭적이며 하나는 개신교적이다. 하나는 교회와 귀족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시민을 위한 것이다. 루벤스는 전자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바쳤으며 렘브란트는 후자를 위해 작업을 하였다. 바로크의 세계는 이 둘 사이를 오간다.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는 것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사상이다. 네덜란드는 시민적 바로크를 추구하였다.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중 '바로크' 편 참조)


2.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개신교가 지배하던 상업 국가였다. 이번 전시에 나온 정물화(* 발타사르 데어 반 아스트의 작품)에 중국 도자기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네덜란드가 중국까지 교역을 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네덜란드는 이러한 상업활동을 통해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미국이 패권 국가가 되었듯이 17세기 유럽의 패권 국가는  네덜란드였다. 그 당시 네덜란드의 자신감이 이번 전시 작품들 속에 숨어있다.


3. 바로크적 자신감

이러한 자신감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긍지를 자신만만하게 표현하게 하였으며(* 여러 장르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여러 바로크 철학자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의 세계와 동일한 것이다.

특히 삶의 부질없음(vanitas)을 표상하는 여러 정물화(* 정물은 서양 미술에서 바니타스(허무)를 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섬세한 디테일과 화려한 색채 속에서 삶 깊숙이 들어와 삶의 일부로 자리잡은 듯이 보였다. 이는 허무까지 삶의 운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바로크적 자신감의 결과물이다. 인생의 허무(Vanitas)를 통해 보다 열정적인 현세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4. 전시

개인적으로 무척 뜻깊은 전시였다. 감동적이었고 시민적 바로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 특히 바니타스 정물화는 바로크 양식의 한 특징을 매우 잘 드러내고 있었다. 흔들리는 삶을, 그 속에 흐르는 허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듯한 표현은 바로크적 신념이 어떤 것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실내, 예의가 없고 그림을 보려는 의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관람객은 내가 본 여러 전시들과 마찬가지로 짜증나고 역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