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사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지하련 2003. 12. 10. 11:15

예술의 시작에 대해선 많은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이 의견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시작되었건 그것은 현대처럼 분화되어진 어떤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방'이면서 '마술'이고 '노동'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사용한 이 단어들, 모방, 마술, 노동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언어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예술의 시작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추측이며 그저 그랬을 것이다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아래의 내용도 그러하다.

구석기 시대의 벽화들은 한결같이 어두운 동굴 속에, 요즘 사람들이 자세를 잡기도 힘든 공간 속에 그려져 있다. 구석기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현재의 우리들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구석기인들의 세계는 현재의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냥 쉽게 말해서 동물적 상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때의 인류에게는 사슴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가자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졌다고 친다면, 앞으로 사슴이 지나갈 때마다 감나무에 감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전혀 무관한 것이지만, 이 때의 인류에게는 연관될 수 있었다.

즉 우리의 지성이 생겨나지 않은 상태이고 인류의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감각 기관이 지각한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고 인상주의가 도래하기 전까지 예술의 역사 속에는 찾아볼 수 없는 감각에 충실한 양식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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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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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2 > 라스코 동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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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3 > 브라상퓌의 여인 La Dame de Brassempouy



하지만 신석기 시대로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갑자기 추상적인 형태의 벽화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예술의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극적 단절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은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시기는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혁명적’이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신석기농업혁명’이라고 말한다. 드디어 인류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수렵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 혁명 속에는 세계관의 변화도 포함되어있다. 그것은 자연 속에서의 인간, 자연과 구별되지 않던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대립된 자로서의 인간, 자연을 이용하고 응용하는 자로서의 인간으로 변화를 의미하였다.

정확하게 이 때부터 인간은 질서를 요구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자연에게 적용된 그 어떤 것이다. 이 때 등장하게 되는 기하학적 양식은 자연의 어떤 특정 대상을 인간이 지각하고 인식하는 어떤 표상(representation)으로 옮긴 것이다. 즉 감각 지각에 충실한 표현이 아니라 감각 지각으로 받아들였으나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상징이나 기호로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집트 시대의 양식은 바로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예술 양식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이집트 시대의 예술 양식 전체를 물들이는 것은 ‘정면성의 원리’이다. 어느 미술책에서 이 정면성의 원리를 적용된 그림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놓은 것이 있어 인용해본다.

- 얼굴은 언제나 측면의 모습으로 표현하되, 정면에서 본 한 쪽 눈만 보이도록 한다.
- 어깨와 몸통은 반드시 정면을 향하도록 한다. 여성의 몸통은 한쪽 가슴만 측면으로 보이도록 한다.
- 팔과 다리는 반드시 수족이 늘어진 자세로 측면의 모습으로 표현해야 한다.
- 서 있는 인물들은 언제나 두 발을 땅 위에 확실하게 딛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이 정면성이 동물, 노동자, 음악가, 무용가 등 세속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인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정면성은 이집트 예술의 위계적 성격을 드러내는 양식 상 특징인 것이다. 이 정면성의 원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에서 표현된 위계적 성격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그 인물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양식 상의 특징인 것이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정면성의 원리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다. 비잔틴의 모자이크 속에서 예수는 황금빛 모자이크 속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그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한 양식적 특징으로 정면성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그리고 로마네스크 건물의 부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부조는 크게 표현하면서 다른 인물들은 작게 표현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정면성의 원리가 적용된 예이다. 즉 위계적 질서를 예술 작품 속에 드러내기 위해 취해지는 예술 양식 상의 특징들은 대부분 이러한 정면성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예술 양식의 특징은 내세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곰브리치는 ‘영원을 향한 미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당시 이집트인의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 때 이집트인의 삶은 ‘변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해마다 나일강은 범람하였으며 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때 이집트인은 현세의 삶에 대한 갈구나 염원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지나 있는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염원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단 한 번 이집트의 예술 양식에 변화가 보였는데, 이는 아케나톤왕이 수도를 옮기고 유일신 체제로 바꾸었을 때뿐이었다. 이 때를 하우저는 이집트의 인상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만큼 혁명적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기하학주의가 주류였던 이집트 예술 양식 속에서 아주 짧은 시기였을 뿐이다.

이러한 이집트 예술 양식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 국가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 무렵 융성하였던 크레타 문명의 예술 양식은 이집트와는 사뭇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이집트의 기하학주의와 달리 크레타는 상대적으로 자연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집트가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정착 생활이었던 반해 크레타 문명이 해상 교역과 약탈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었고 정지된 삶을 살았던 이집트인들과 달리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던 크레타인들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즉 동시대의 예술 양식이라고 하더라도 자연 환경에 따라 그 예술 양식은 틀려진다는 것이다. 이는 한 시대의 예술 양식이 예술을 창조하는 한 개인이나 집단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치, 종교, 자연 환경 등 여러 요인들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크레타의 예술을 보면서 크레타인들의 ‘예술의욕(Kunstwollen)’을 어떤 것이었나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크레타인들의 세계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변화무쌍한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한 때 크레타의 귀족들은 번영을 누렸으며 그들의 예술 양식이 현재까지 벽화나 여러 유물로 남아 전하는 것이다. 즉 귀족이라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현세의 삶을 살았던 이집트의 귀족과 달리 크레타의 귀족들은 쉴 새 없이 바다로 나가 교역을 하며 또는 다른 지방에서 약탈해온 여러 재화들 속에서 현세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 여겼을 것이며 이러한 그들의 세계관이 크레타의 예술 양식으로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예술은 이집트와 크레타 사이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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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4 > Rock painting from Western New South Wales, at Gundabooka. Aproximately 5,000 years 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