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사

로코코 예술

지하련 2007. 4. 13. 18:55

* 2004년에 작성하였던 글입니다. 로코로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크와 로코코

바로크 양식은 카톨릭과 귀족을 위한 양식이었다. 바로크의 웅장하고 거대한 양식은 카톨릭과 귀족을 위한 것이지 개신교와 시민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화가들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풍긴다. 그러나 이도 자기 과시적이며 은근히 귀족과 경쟁하는 구도로 발전한 양식이라는 점에서 카톨릭적이며 궁정적 바로크와 동일한 예술 의욕(kunstwollen)을 가진다. 즉 바로크는 귀족과 돈 많은 시민계급을 위한 양식이었다.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의 패권국가였다. 이런 점에서 로코코는 분명 바로크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대체로 로코코는 귀족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데카르트적 시각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바로크의 후기 양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18세기라는, 17세기와는 사뭇 다른 시대의 산물이다. 그것은 귀족의 시대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는 시대의 산물이며 더 이상 기독교가 그간 누려오던 호소력을 잃어버리는 시대의 양식이며 그래서 17세기 바로크 양식이 가지고 있었던 장엄하고 격정적인 느낌을 잃어버리고 우아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래서 바로크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격정적이며 진지했던 양식은 티에폴로처럼 가볍고 우아하며 밝은 색채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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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vestiture of Herold as Duke of Franconia
Giambattista Tiepolo, 1751
Fresco, 400 x 500 cm Imperial Hall of the Residenz, Wurzburg



티에폴로의 운동감은 바로크의 연속이지만, 그 공간과 색채는 로코코 양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더구나 그가 공간을 구성할 때, 그 공간이 아름다운 꿈 속처럼 화려하고 자극적일 때, 그래서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때, 이는 프랑스 로코코 화가들인 와토나 프라고나르와 공유했던 그런 양식이었다. 이런 이유로 바로크와의 연속을 강조할 때 로코코는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이해되며 로코코만의 특징을 강조할 때는 바로크와는 개별적인 양식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로코코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선 17세기와 다른 18세기만의 독자적인 성격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성이라는 이름의 빛

시기적으로 로코코는 루이 15세의 통치기간인 1715년부터 1774년과 겹친다. 이 시기는 유럽의 역사에서 무척 흥미로운 시기이다. 루소의 시대이면서 와토의 시대이기도 한 이 시대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며 귀족과 시민계급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가 이전의 호소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며 17세기의 근대적 세계관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대되는 시기이다.

즉, 이성의 발명은 17세기의 소산이지만, 이성의 적용과 확장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귀결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성의 적용과 확장은 바로크부터 이어져온 자신감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시민-부르주아의 자신감이었다. 아니 근대를 추동하였던 인과율적이며 기계론적인 이 정신이 드디어 시민-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정당한 주인을 만난 셈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전과 정치적 상황 변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혈 혁명으로 정치 개혁을 지속하였던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지배계급인 토지귀족이 자연스럽게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였지만, 프랑스에서는 토지귀족이 몰락하고 도시의 자본가들이 등장하는 변혁기를 거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했던 로코코 양식은 유럽 대륙에서는 몰락하는 귀족 양식이었고 영국에서는 농업에서 상업, 산업으로 옮겨간 귀족의 양식이 되었다. 이러한 로코코 양식의 철학적 반영은 장 자끄 루소이다. 그리고 이 계몽주의 사상가의 영향력은 로코코에서 시작해서 신고전주의를 거쳐 낭만주의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루소의 사상이 여러 갈래로 펼쳐져 있으며 한 부분에서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 시각이 있다면 한 부분에서는 미래에 대한 암울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양식으로서 로코코 양식은 유미주의적이며 16세기 매너리즘 화가들이 그랬듯이 도피적이며 몽환적이다. 그리고 루소의 생각처럼 '문명적 인간이란 하나의 퇴화 현상이고 문명화의 전 역사란 인간운명의 배반'이라는 생각을 로코코의 예술가들이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짜르트의 종교적 주제를 다룬 음악들이 한결같이 종교와는 무관한 어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종교가 그 호소력을 잃어가며 왕과 귀족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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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grimage to Cythera
Antoine Watteau, 1717
Oil on canvas,129 x 194 cm
Charlottenburg Palace, Berlin

그래서 와토의 저 작품 속에서의 귀족들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듯이 보이는 것일까. 그것도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행복과 쾌락을 쥘 수 있는 이상향으로.

상업자본주의에서의 산업자본주의로

근대(Modern)란, '자본가들의 생산에 의해 제어되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17세기는 근대의 기계론 체계가 만들어졌다면 18세기는 이 체계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형태도 변화시키는데, 17세기가 식민지 경제에 의존하여 원격지 무역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상업자본주의라면, 그래서 수요자가 항상 공급자의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았던 자본주의였다면, 18세기는 이러한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수요자와 공급자를 일치시킬 수 있는, 산업 시설에 기반을 둔 산업자본주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바로크 시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풍요로운 자신감을 계급적 갈등으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갈등은 토지 귀족과 시민계급 간의 갈등으로 표면화된다. 즉 18세기의 미국독립전쟁이나 프랑스 대혁명은 독자적인 정치 혁명이 아니라 산업혁명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영국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고 도리어 버크의 보수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건, 미국이라는 원격지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과 무혈정치혁명으로 통해 기존의 토지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산업자본주의의 지배계급으로 이행되었기 때문이고 군주와 의회와 공존하는 정치 시스템을 잘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국의 특수성이 영국의 보수주의를 가져왔고 동시에 대륙의 우울하고 슬픈 로코코 양식 대신 소박하며 가볍고 산뜻한 느낌의 로코코 양식을 가져오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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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and Mrs. Andrews
Thomas Gainsborough, 1750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at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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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y Sunderlin
Sir Joshua Reynolds, 1786
Oil on canvas, 236 x 145 cm
Staatliche Museen, Berlin


토마스 게인즈버러와 조슈아 레이놀즈는 그 당시 영국 로코코의 대표적인 두 화가였으며 중세 이후 최초로 등장한 영국 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만큼 영국인들의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것일까. 이들이 그렸던 인물들의 표정에서 그 당시 자본주의를 선도하고 있었던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보이는 듯하다. 이러한 자부심은 낭만주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몇몇 예술사가들은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를 거치는 동안 영국 예술사들의 정신은 공통적인 기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공통적인 기반이란, 사유 재산을 옹호하기 위한 경험론 철학과 보수주의이며 산업혁명과 귀족-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리고 낭만주의 후기에 가서는 이러한 기반은 위선적이며 기만적인 양식으로 향한다.

사적인 공간의 부각

18세기에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로 지속되어 온 개인주의의 심화에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표현보다는 합리적이며 기계론적인 자본주의의 심화에서 기인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리로, 단절로 이어지며 프랑스 대혁명 이후 본격화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시장이라는 공간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어느 사회학자가 지적하듯이 18세기 도시의 시장은 중세 후기나 르네상스 시대의 시장과 같지 않았다. 드디어 자유경쟁시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시장처럼 화폐에 의해 움직이며 서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화폐경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18세기 공적 삶의 패턴이 합리화되면 될수록 공적 사회의 비인격화는 가속되는 것이다.

이때 두드러지는 것이 사적 삶, 사적인 공간의 부각이다. 즉 근대 기계론이 공적인 삶을 지배하게 될 때, 공적인 삶이 비인격화될 때, 도리어 개인이 속해있던 가족, 또는 집안의 삶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각은 귀족과 시민계급에게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귀족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대한 몰두와 시민계급의 몰두는 양식적으로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귀족의 경우 자신들의 시대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것이며 시민계급의 경우에는 자신의 도덕과 생활이 귀족의 그것보다 낫다는 주의주장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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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ilet of Venus
Francois Boucher, 1751
Oil on canvas, 108,3 x 85,1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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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wn Odalisk
Francois Boucher,1745
Oil on canvas
Musee du Louvre, Paris

사적인 공간 속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감정적인 친근함이며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우아한 에로티시즘이었다. 그래서 로코코 예술에서의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연인으로서의 여성이며 섹스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소와 부셰의 우아한 색채와 내밀한 느낌의 인물들은 이런 로코코 예술에서의 여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여성이 존재하는 곳은 몰락하는 귀족이 소유하고 있었던 대저택 깊숙한 곳의 침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요즘의 우리가 어디 먼 관광지에 놀러가서 밤 늦게 유흥을 즐기고 잠들었다가, 커튼이 쳐져 있는 침실에서 화창한 일요일 오전 감미로운 새소리와 따사로운 햇살에 잠을 깨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어떤 감정이었다. 이렇듯 귀족을 위해 그림을 그리던 몇몇 로코코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작품은 자신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세상의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을 잊고 감미롭고 달콤한 한 순간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며 그것을 향해 더욱 몰두하는 쾌락적이며 감각적인 것에 호소하는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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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roken Jug
Jean-Baptiste Greuze, 1785
Oil on canvas, 110 x 85 cm
Musee du Louvr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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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llage Betrothal
Jean-Baptiste Greuze, 1761
Oil on canvas, 91.4 x 118.1 cm
Musee du Louvre, Paris

하지만 그뢰즈에게 있어 이러한 에로티시즘은 다른 방식으로 보여진다. 계몽주의적이며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에 공감하고 있었던 그뢰즈에게 있어 로코코의 에로티시즘은 부르주아 계급들의 도덕적 위상과 검소함을 반영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뢰즈의 여성은 에로틱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유혹하지만 그것을 노골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은 일을 하고 있거나 도시의 여느 시민 계급의 가정 속에 위치해 있는다. 이러한 그뢰즈의 특징으로 인해 몇몇 예술사가들은 그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분류하지만, 양식상 그는 로코코에 속하며 단지 계몽주의의 영향권 속에서 로코코 양식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했을 뿐이다.

18세기의, 그리고 로코코 시대의 이러한 사적 공간의 부각은 건축의 안과 밖에 사치스러운 장식미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종종 우리가 로코코라는 단어를 보게 되면 바로 회화나 음악을 떠올리지 않고 가구나 실내 장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건물의 장엄하고 거대한 바로크적 외형이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건물 안이, 방 안의 장식이나 가구가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내 장식이 건물의 외관까지 장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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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otel de Soubise a Paris (1735-1740)


유미주의

로코코 예술가들 중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인 장 안트완 와또는 생애 대부분을 비극적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몰락하는 한 시대를, 그리고 그 시대가 꿈 속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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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tes Venitiennes
Antoine Watteau, 1718-19
Oil on canvas, 56 x 46 cm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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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zzetin
Antoine Watteau, 1717-19
Oil on canvas, 55,2 x 43,2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페뜨 갈랑뜨(fete galante, 우아한 연회)라는 단어는 장 안트완 와토에게서 유래하며 로코코 예술이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후 랑크레와 같은 화가에게 이어져, 하나의 독립적인 미술 경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와토와 이후 화가들과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화려하고 흥겨운 연회 속에서 비극적 결말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화사하고 우아한 색채와 율동을 가진 와토의 작품들 속에서 인물들의 얼굴 표정, 그들이 바라보는 배경,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싸는 것이 몰락하는 한 시대를 예감하는 멜랑콜리, 즉 우울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시대가 어떤 시대로 넘어갈 때, 전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가치나 세계관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고 직감할 때, 그래서 그것을 잊기 위해 쾌락의 꿈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우울함인 셈이다. 이러한 우울함이 음악으로 옮겨갈 때 모짜르트의 음악이 나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로코코 양식은 본질적으로 유미주의 양식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태도의 반영이며 객관적 세계의 존재 유/무는 오직 가상적 세계에 달려있다는 절망적 세계 인식의 예술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은 현실 대신 꿈을, 공적 공간 대신 사적 공간을, 모험보다는 안주를, 순간적인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그리고 로코코 시대를 살았던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에서는 급격한 보수주의로, 대륙에서는 비참한 몰락을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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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wing
Jean-Honore Fragonard, 1767
Oil on canvas, 81 x 64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부르주아의 시대

부르주아의 시대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네덜란드의 시민적 바로크 화가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이는 네덜란드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전유럽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오면 이 상황은 전유럽적인 상황이 되며 귀족과 시민계급간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귀족이 이러한 갈등을 애써 외면하면서, 또는 갈등을 느낄 수 조차 없이 자신들의 내밀한 사적인 꿈과 쾌락의 공간 속으로 물러났다면 도리어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도덕적 가치의 우위를 공공연히 내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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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urn from the Market
Jean-Baptiste-Simeon Chardin, 1739
Oil on canvas
Musee du Louvr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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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ean Diet" with Cooking Utensils
Jean-Baptiste-Simeon Chardin, 1731
Oil on canvas, 33 x 41 cm
Musee du Louvre, Paris

사르댕의 정물은 바로크의 바니타스 정물화의 연장이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부각시킨다. 즉 바로크의 정물은 시민계급에게만 해당되는 어떤 도덕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샤르댕의 정물은 부르주아의 세계의 가치가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샤르댕은 그뢰즈와 같은 위치에 놓이며 프랑스 대혁명을 예감케 하는 화가이다.

영국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가진 예술가가 있었는데, 그는 윌리엄 호가스였다. 윌리엄 호가스는 부르주아의 계급의 도덕, 동시에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남겼다. 그는 일련의 도덕극 시리즈를 만들었고 당시 부르조아 시민 계급의 도덕에 위배되는 행동들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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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lection Entertainment
William Hogarth, 1754
Oil on canvas, 100 x 127 cm
Sir John Soane's Museum, 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