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현대사상의 모험, 타케다 세이지

지하련 1998. 4. 18. 23:28

       
        * '나'로부터
       
        세계가 있다. 그리고 난 그  세계를 본다. 그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없어도 세계는 존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난 세계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이미 지금 난 여기 있으며, 동시에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으로(동시에 난  내자신이 부재하
     는 상황을 인식할 수 없음으로). 그렇다면, 왜 난 세계 속에서 아파하
     는 것일까? 나의 고통 때문에, 혹은 타인의 고통때문에.  정말로 타인
     의 고통이라는, 보다 넓게 세계의 고통이라는 것은 내  고통이나 아픔
     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험상 세계의 아픔은  내 아
     픔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소설가 박상륭은  예술가들의 '메시아컴
     플렉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아픔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는
     길, 즉 나의 아픔과 세계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 현대사상의 모험 - 타케다 세이지(김원구 옮김. 우석. 1996)
       
        '치유'라는 단어 대신 '변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자(힘없는 단
     어와 힘있는 단어의 차이). 타케다 세이지는 현대사상-현대 프랑스 철
     학들-들은 헤겔-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발이거나, 그것에  대한 절망,
     혹은 연속이라고 정의내리며, 현대사상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현대사
     상들은 한결같이 니힐리즘이며, 회의론(懷疑論)이고, 그러면서 사회와
     개인 간의 적대적 관계에 대해 일방적으로 反사회적 심정을 감추지 못
     하는 사상이라고 정의내린다.
        헤겔 철학은 '절대적으로' 이성을 신뢰하였기 체계가 완성될 수 있
     었지만, 과연 그 헤겔적 이성은 믿을 만한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철학이라는 것들의 원조로  '니체'가 소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이성'은 가치가 있는 것인가?
       
        * 학생운동 - 진보의 몸짓?
       
        요즘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들 중의 하나가 '난 왜  운동권이 되지
     않았을까'이다. 여기에 대해서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대학을 처음
     들어갔을 때, '운동권 선배들의 그 일자무식' 때문이었다.  동시에 꼭
     평생 사회운동을 할 것같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대더니  지금은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다(* 무턱대고 따라다니던 동기들을 보면  말이 나오
     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난 학과의 아웃사이더가 되기
     로 자처했다.
        최근 임수경의 '난 이념보다 인간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버스 안의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다. 순간 난 내가 왜 운동권을 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왜냐면, 난 인간보다 이념을 믿고 있음으로. '이념'이라
     는 단어에 너무 현혹되지는 말자. 이것은 단지 임수경의 말 그대로 사
     용하기 위해서 선택한  단어일 뿐이다.  여기서 '이념'이라는  단어는
     '이성'이나 '철학' 등으로 바꾸어 사용될 수 있는, 광의(廣義)의 단어
     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해."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광기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경험상으로 알
     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인간들은  한발 늦게
     도착한다. 모든 상황은 이미 '광기'들에 의해 종결되었음으로. 그렇다
     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날개짓도 해보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어
     두운 전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진보의  몸짓은 '광기
     와 이성 사이'에서 오간다. 한총련이라는 학생운동 단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광기와 이성의 두 갈래 사이에서 한순간  '광기'로 가
     버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국가권력의  광
     기'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추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광기는 합
     법적인 광기이다. 그래서, 홉스는 국가를 '리바이던'이라고 하지 않았
     는가). 이성은 언제나 합법적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광기를 제외한
     모든 광기는 비합법적인 것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광기를  만든 것
     은 무엇인가?
       
        * 다시 '이성'의 문제로
        
        국가 권력의 광기를 제조해낸 것은 '이성'이었다. 그리고  그 광기
     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이성'뿐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철학들은 그
     이성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버린다.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아무래도
     틀렸어. 이 세상은 너무 단단하단 말이야"라는 한탄의 목소리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전망이 아직도
     유효하다'라는 입장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다. 왜냐면, '이념은
     말로 지껄일 때는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보
     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이념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가져오느냐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현대사상의 모험>>. 33쪽)
       
        타케다 세이지의 결론은 '그래도, 그래도, 진보를 위해서 ... ...'
     이다. 이 힘없는 결론이 포스트모던철학를 수용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는 방법 중에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사회의 변혁 그자체를 초월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가능성이 하나하나의 인간이 저마다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초월을 찾는 것을 떠받쳐주는 근거가 된다는 이유로 의하여 현
     실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시도
     하여 보는 길을 저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같은 책. 241쪽)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발을 멈칫멈칫거린다. 이 멈칫멈칫거림의 흔적
     들이 우리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포스트
     모던철학을 수용하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율
     배반적 행위는 도리어 우리에게 화를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
       
        * 이성: 유일한 희망
       
        내가 움직이는, 일종의 판단의 축은 크게 감성과  이성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대립된다기 보다는 보완적인  관계를 형
     성한다. 이 보완적인 관계에 대해선 여러 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이다. 대체로 작품창작에서는 '감성'에 의존한다. 하지만,  다른 것들
     은 대체로 '이성'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둘은 내  작품(혹은 사유思
     惟)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서로 도와주고 있다. 이성적으로  파악된 세
     계를 감성적으로 옮겨놓는 작업임으로.(1) 현대철학들이  '미학'에 주
     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난 현재 이 지점에 서있다.  왜냐면, '감
     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기 때문
     이다. 현대  예술들의  주류는 '감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들이
     다.(2) 모더니즘에서의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아방가르
     드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난 이 지점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다.
     난 나자신의 '이성'을 믿고 있음으로.
       
        _____________
        1. 여기에 대해선 부가의 설명이 필요하리라. 문제는  세계 인식의
     방법일 것이다. 과연 작가의 '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작가의
     '감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도대체 그 작가의 이성적  세계 인식
     과 감성적 세계 인식의 차이는 뭔가라는 의문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위험한 문장이다. 여기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경우라는 점이다. 나의 믿음: 작가는  최대한 합리적(이성)
     으로 세계를 파악해야 하며, 그 파악된 세계를 '재구성'하여 독자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다. '재구성'의 방식에 따라 어떤 소설은 낭만주의소
     설이 되고, 어떤 소설은 누보로망이 된다.
       
        2.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부터  먼저 던져
     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견해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존재하
     다. 한국은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할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미
     국이나 유럽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신디 셔먼이나 에릭 피슬같은 예술가들을  모더니스트들로 분
     류하기에 그들은 모더니스트들과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들의 창작에 대해선 아직 뭐라 평할 단계가 되지 못한다. 이전과 구분
     되고, 뭔가 다르다고 두 손을 들고 환영할 것인가에 대해선 아직 미지
     수이다.
        이 문장에서  이야기한 '감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은  팝아트
     이후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선 그 이전의 미술의 흐름을 숙지하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포
     스트모던 예술가들은 단호하게 이 미술의 흐름의 바깥으로 벗어나  버
     린다.
       
       
        * 덧붙이는 말
       
        01.
        혹시, 타케다 세이지의 <<현대사상의 모험>>을 사려는 생각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보다는 낫다.
     왜냐면, 타케다 세이지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1970년대 초두에 두 개의 상징적인 사건이  났다. 하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이고 또 하나는 아사마 산장에 있었던 연
     합 적군 사건이다. 왜 이 두 사건이 상징적이냐 하면  이들 사건은 이
     른바 좌우의 양익으로부터 사회 체제에 가해진 거의 마지막 직접 행동
     이었기 때문이다."(29쪽에서 30쪽)
       
        그의 이 문제의식은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 나카무라  유지로의 그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철학
     과 굴뚝청소부>>에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다.
       
        02.
        위의 글은 타케다 세이지의 문제의식과 내  자신의 상황(문제의식)
     을 서로 연관지어 작성한 글이다. 무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03.
        번역은 '개판'이다. '개판'이라는 표현도 어쩌면  약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으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이
     번역하지 그래?"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저작권법에 의해 마음대로
     번역도 하지 못한다(* 꼭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난 일
     본어는 하나도 모른다). 이 책의 역자 약력을 보니, 이 정도의 번역도
     꽤나 힘들게 했을 것같다. 그러니, 이 책의 역자에 대해선  아무런 감
     정도 없다. 단지 이 나라의 번역문화에 대한 감정만 있을  뿐. 다분히
     감정적인 발언이지만, '번역 감사원'같은 것을 만들어  엉터리 번역들
     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곳을 만들면 좋겠다. 동시에 번역에 대해 학문
     적 성과를 인정해주어야 함은 물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