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萬感이 교차하는 시간들.

지하련 1998. 2. 25. 23:37


         
          해바라기의 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서는 그 차거운 碑ㅅ돌을 세우지 마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
       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 날아 오르
       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咸亨洙. <<詩人部落>> 창간호. 1936.
         
          길을 가다 해바라기로 둘러쳐진  무덤을 본다면, 그대의 무덤인  줄
       알고 고개 숙여 그대를  그리워하겠나이다. 그리고, 파아란 허공  속을
       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저는 아직 꺼지지 않은 그대 꿈을  쫓아 산으
       로, 들로, 바다로 뛰어다니겠나이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길은  갈색
       보도블록으로, 뚝뚝 부서진 시어처럼  외로이 서있는 가로등과  가로수
       로, 멍한 눈빛으로 하루를 사는 행인으로 둘러쌓여있음을.
         
                              *                          *
         
          글을 쓰지 못한다는 무력감은 일주일 넘기고 있다(*  문화공장에 올
       리는 글이 요즘 쓰고 있는 글이 전부일 정도로). 시를  쓰던 선배가 죽
       었다. 서른이거나,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을 나이일 텐데, 그는  몸의
       통증을 느낀 지 하루만에 죽었다. 어제는 그의 遺作들을  읽었다. 그의
       시는 일종의 암호처럼, 시어와 시어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그 거리
       사이에서 그는 아파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거리는  가까워질 수
       있었는데).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아픔의 거리를 즐기고  있었
       다. 그 먼 거리의 은유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도 날 버리고, 문학도 날 버렸다"라며, 먼 선배가 신문  한 귀
       퉁이를 장식하며 자살했다. 난 그녀를 알지 못한다. 아마 동문회나, 혹
       은 길 가다 우연히, 그렇게 옆을 스쳐지나갔을 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자살이라는 테마는 너무 가슴 아프다. 분명 그녀는 자신을 버린 사랑을
       향해 칼을 들었을리라. 그러나, 그 칼은 자신을 향했고, 상처  입은 채
       로 세상 이전으로 돌아갔으리라.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썩어서 공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 ...)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                  *
         
          萬感이 교차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겨울도 아니고,  그렇다고
       봄도 아닌 날씨 탓인가. 내 몸뚱아리는 그것이 늦가을의 날씨라는 고집
       을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날씨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날씨는  그냥
       날씨일 뿐임을.
         
          "詩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
       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 김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