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파이트 클럽, 척 팔라닉

지하련 2005. 11. 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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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Fight Club, 척 팔라닉(Chuck Palahniuk) 지음, 최필원 옮김, 책세상, 2002년


말라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타일러가 다시 나타난다.
마치 마술을 부리듯. 우리 부모님도 이런 기술을 무려 오 년 동안 서로에게 썼었는데.
- 87쪽

이 문장은 매우 신기했다. 하지만 금방 속고 만다. 어떤 트릭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부모님도 그랬다고 하니, 혹시 사랑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분석이나 의미 부여를 위한 상황 설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착각이었다. 정신병자들이 가지는 소설적 매혹은 대단하다. 이와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명확하다. 그리고 매우 ‘손쉬운’ 방법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충격을 받았을 끝의 반전은, 실은 의도된 것으로서 소설 쓰기의 초보들이 곧잘 이용하고 싶어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런 반전이 일어났다고 해서, 나와 타일러가 동일인물이라고 해서 어떤 것이 달라질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방황하고 고민하는 것일까? 방황의 이유도, 고민의 이유도 없다. 막연한 상황 설명에 깊이 없는 변명, 돌발적인 행동들의 연속, 비현실적인 상황 설명. 극적인 재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뛰어난 소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 극적인 재미는 오직 두 명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한 명의 인물을 통해서만 나올 뿐이다. 작가는 한 명의 인물을 미리 정해놓고 몇 개의 사건들을 통과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빠른 전개로 스토리를 이어나가지만, 결정적으로 이 한 명의 인물에게는 진짜 현실 속에서의 삶이 없다. 모든 것들이 공중에 붕 떠있고 이유도 없으며 분노와 절망감만이 맴돌 뿐이다.

파이트클럽이 실존한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바뀌어진다고 착각하면 대단한 오산이다. 이미 이 소설을 읽은 이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주먹으로 치고 받는다고 다 싸움이 되고 쓰레기같이 보이던 인생이 고귀해지고 진실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한 사람만 나올 뿐이고 그 한 사람은 정신병자이며 결정적으로 그 한 사람이 왜 정신병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없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매우 형편없는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

사족) 혹시 이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설, 또는 주인공에 대해 공감을 표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척 팔라닉의 의도는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 소설은 상황 설명이나 원인 따위를 이야기하지 않고 과격하고 돌발적이며 현실 속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어떤 상황들을 만들어 놓고 그 속으로 정신병자 한 명을 통과시키는 방식만으로도 가능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이 소설 주인공의 정신병명은 ‘해리성 정체감장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