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하련 2005. 11. 4. 00:32

 

흉터와 무늬 - 4점
최영미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음, 램덤하우스중앙, 2005년



도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죽은 언니 이야기? 아니면 그걸 뒤죽박죽 섞어놓은 가족 이야기?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 이야기? 그럼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그런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어 독자들이 무엇을 알아주었으면 좋을까? 그런 가족이 있었다고?

“지난 4년은 시인이었던 과거의 나와 소설가가 되려는 내가 서로 투쟁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천매가 넘는 분량을 써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 한겨레신문 2005년 5월 11일자

이 소설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저 가족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러기에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갈등은 거의 없다. 그저 작중 화자가 보고 느낀 것만 감성적으로 서술해 내려갈 뿐이다. 그리고 그 서술 방식마저 그날그날의 일기처럼 짧게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너무 손쉬운 방식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4년 동안 이 소설을 쓰게 된 것일까. 그건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이야기는 장편 소설로 만들어낼 만한 것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많은 에피소드를 없애야만 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추억들에 대한 산만하고 구구절절한 감상들은 다 삭제해야만 한다. 그리고 소설 내의 사건과 갈등, 내적 압박 등을 보다 밀도 있게 그려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그녀의 추억에, 그녀의 개인사에 잠겨있었고 더구나 그것들과 갈등 관계에 놓여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소설은 결말이 나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이런 소설은 꽤 슬프다. 소설의 내용이 슬픈 것이 아니라, 이런 유형의 소설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이제 한 개인은 그 개인을 둘러싼 가족, 거리, 마을, 도시들이 숨기고 있는 갈등과 모순을 읽어낼 힘도 없고 그것들의 내부 깊숙이 들어가 파헤칠 용기도 집념도 없다. 도리어 그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자기자신만 바라볼 뿐이며 모든 것을 자기자신으로 환원시켜버린다. 그래서 종종 소설은 일기가 되어버리고 고백록이 되며 체험 수기가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다양한 형식들을 동원하지만, 그렇게 해 봤자 일기이자, 고백록이며 체험 수기인 사실은 숨겨지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기자신으로 환원된 소설은 끊임없이 자기자신 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 압박, 모순, 환상 등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 고백록 소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최영미의 소설에선 그런 것마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난 이런 가족 속에서 이렇게 살아왔어요.’라고 이야기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소설은 전체적으로 밋밋하며 소설의 아무 곳이나 펼쳐놓고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동일한 형태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성장 소설도 아니고 사회 소설도 아니다. 혹시 일기를 고쳐 소설로 옮겨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하지만 4년 동안 고생한, 그리고 지극히 ‘현대적인’ 최영미를 위해 아무런 이름도 없는 독자가 던지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소설은 언제나 표현하고자 하는 갈등과 모순을 최대화시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절대로 세상과 화해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