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나의 미카엘, 아모스 오즈

지하련 2001. 4. 25. 16:58


나의 미카엘 - 10점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민음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 p.7

하지만 한나는 죽는다. 그녀의 사랑하던 힘이 죽고 그녀의 기억들이 죽고 그녀의 꿈들이 죽는다. 그녀가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사랑과 모든 기억들로부터 떠남으로써 그녀는 나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그녀의 슬픈 죽음의 날개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검은 날개가 눈에 익다. 우리들의 눈에 익숙한 그녀의 검은 날개.

때때로 증명할 수 없는 물음들이 우리들을 인생의 고통 속으로 빠뜨리곤 한다. 꼭 ‘넌 날 사랑하니’라는, 그 어떤 대답으로도 채워지지 못하는 깊은 정답의 우물을 채우기 위해 지쳐 가는, 그래서 끝내 헤어지고 마는 戀人들처럼.

한나는 언제나 꿈을 꾼다. 꿈 속에서 그녀는 공주이지만, 갑자기 生의 포로가 되어 쫓기기도 한다. 그러나 미카엘, 나의 미카엘은 언제나 침착하고, 합리적이며, 조심스럽다. 그는 언제나 한나를 위해 성실한 몸짓을 보여준다. 그 성실함이 한나는 너무도 싫다. 아니 그것이 부럽다. 아무 것도 증명해 줄 수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토록 성실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는 자체가 부럽다. 그 성실함에 대한 질투가 한나로 하여금 늘 꿈 속으로 도망치게 한다. 하지만 이제 한나는 꿈을 꾸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그토록 자신의 생을 억누르고 있던 사랑의 힘을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모스 오즈가 29살에 쓴 이 소설은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視線을 먹어버리는 자외선과도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선 ‘난 사랑 따윈 믿지 않아’라는 상표의 선글라스가 필요하다. 이 선글라스를 가지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나의 미카엘』은 너무나도 행복한 소설이다. ‘그것 봐, 사랑은 믿을 수 없는 거야, 한나’라면서 웃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난 이 선글라스는 한 여자의 생일선물로 줘버렸고, 이젠 없다. ‘나도 죽고 싶지 않다’라면서 한나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를 싣는다. 나도 사랑을 하고 싶지만, 사랑할 힘이 이젠 남아 있지 않다. 어느 老詩人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라는 시집제목은 얼마나 행복한 속삭임인가. 하지만 한때 사랑하는 힘이 넘쳤던 사람에게 사랑을 믿지 말라는 소리는 죽음을 뜻한다. 한나의 꺼져가는 목소리는 4월의 흐린 창가에서 부서지는 내 잃어버린 사랑의 소리와 닮아 있다. 그래서 나도 한나와 함께,


나는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저 유리만 투명했으면, 그것이 전부다.
- p.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