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하루

지하련 2002. 9. 15. 17:23
하루. 참 기인 시간이지. 기인 것들 중 매력적이거나 참혹한 것들은 계단을 가지고 있어. 높이 솟은 건물이나 성, 또는 뾰족탑 같은 것들은 어김없이 계단을 가지고 있어. 하루에도 계단이 있어. 꼭 인생에 계단이 있는 것처럼.

택시 기사가 건넨 담배에도 계단이 있었어.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어. 찬 밤 바람 사이로 담배의 계단이 사라져갔지. 하얀 연기와 소스라치는 밤 영혼들 사이로.

검은 자동차들이 일렬로 지나갔고 그가 모는 택시는 그 행렬을 가로지르며 나아갔어. 아주 짧은 행렬이었지. 속이 텅 비어있거나 기만적인 것들은 짧아. 그가 내 쉬는 호흡들 사이로 하얀 담배 연기가 밀려나와 택시의 몸을 감싸 돌았어.

계단들로 이루어진 택시 하나, 새벽 도시를 질주했지.

하루. 참 기인 시간이지. 기인 것들 중 매력적이거나 참혹한 것들은 계단을 가지고 있어. 기인 몸매를 가진 세 청년이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 기인 청춘을 노래하더라. 쫄바지에 베이지색 티셔츠, 한 손엔 손가방, 한 손엔 담배 하나, 가슴엔 사랑의 문신, 아마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했을 꺼야.

너무 많은 인생들을 실어 나르느라 지칠 대로 지친 열차들이 들어오는 걸 세 청년들은 바라보았지. 한 때 기인 몸매를 자랑하던 열차들이었지만, 그래서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인 몸에 붙어있던 계단들이 사라져버렸어. 지금은 자국으로만 남아 편평해졌지. 기인 몸매를 가진 세 청년들은 계단이 사라진 열차를 타고 … …

가을 낮은 구름들로 뒤덮인 도시의 오후, 지하에서 막 올라와 몇 층 높이의 궤도를 지나가는 열차들 위에 기인 몸매를 가진 세 청년들이 서서 기인 청춘을 노래하더라. 기인 하늘, 기인 바람 사이로. 기인 사랑을 노래하더라.

하루. 참 기인 시간이었어. 기인 것들 중에서 매력적이거나 참혹한 것들은 계단을 가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