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하련 2007. 5. 13. 10:41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지음), 김성기(옮김), 이마고



내가 창녀가 되면
- 오카모토 아미


내가 창녀가 되면
가장 첫 번째 손님은 오카모토에서 온 다로라네
내가 창녀가 되면
이제가지 사모은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팔아치우고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비누를 사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슬픔을 하나 가득 짊어지고 온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다로의 체취가 남은 내 방은 언제나 깨끗이 청소해놓고 미안하지만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태양 아래서 땀을 흘리며 빨래를 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안드로메다로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주문을 외우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누구도 범하지 못하는 소녀가 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슬픔을 견뎌낸 자비로운 마리아가 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흑인에게 오월의 바람을 가르쳐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흑인에게 재즈를 배우려네 
외울 때는 침대에 누워 다로의 체취를 느끼고
기쁠 때는 창가에 서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조용히 기다리며
공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지면
침대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머나먼 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네  


아침에 일어나 자주빛깔 옷을 입은 던힐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멍한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데라야마 슈지 같은 감수성, 그런 언어를 가진 적이 있었던 것같다. 같다. 같.다. 같다? 글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한 소년이 권총을 갖고 싶어했다.
소녀가 물었다. “뭘 쏘려고?”
소년이 대답했다. “태양. 저 녀석만 바라보면 괜히 울화가 치밀어.”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스리랑카산 홍차를 마시면서 계속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먼 과거의 일이다. 그 사이 은하계는 두 번의 생과 사를 거듭했고 일 억 만 개의 별이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원 포인트 파이브 리터의 정액이 비닐에 쌓인 채로 버려졌으며 그(녀)들은 딴 여자와 눈을 맞춘 채 아메리카 대륙의, 천사들이 산다는 도시로 떠났다. 무심하게. 실제 과거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과거는 조작되고 추억은 새로 만들어진다. 시뮬라크르의 세계. 새로 만들어진다는 건 무척 훌륭한 일이다. 조작되거나 모방되지만, 실제로는 없는, 픽션이다. 시뮬라크르의 세계.


데라야마 슈지의 책은 쉽게 읽을 수 있지만, 꽤 오래 동안 잔상이 남을 것이다. 시종 일관 스물 둘의 언어로 쓰인 이 책은 내가 이미 지나온,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언어와 닮아있었다. 그 과거에 그(의 언어)를 만났다면 열광하였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 사이 이 세상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한 탓이다. 되도록이면 정제된 알코올로만 연명하고 절대로 정액을 낭비하는 일 없이 키스만 했어야 했다.


추천할 생각이 없는 책이다. 헌책방에서 이 책을 보게 된다면 구입해도 좋다. 헌책방에 어울리는 책이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데라야마 슈지는 매력적이지만, 아무런 상처 없이 바로 넘어온 슈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음, 김성기 옮김/이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