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루이스 부르주아: 추상 展 - LOUIS BOURGEOIS : Abstraction

지하련 2007. 5. 30. 18:41

LOUIS BOURGEOIS : Abstraction 
(루이스 부르주아: 추상)

A P R I L  2 0 - J U N E  2 9,  KUKJE GALLERY



나는 그녀의 상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의 작품을 보았지만, 그녀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녀의 작품은 무미건조한 물음표에 가까웠고, 그녀를 향한 찬사와 열광이 되레 이상하게 여겨졌다. 결국 그녀 작품에 대한 비평을 찾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그녀 작품들. 내가 남성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나보다 훨씬 더 건강해서 그런 것일까. 읽어도 선뜻 그녀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가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는 매우 건강해서 병적인 나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그녀가 관심을 가졌다는 기하학에서 영향 받았다고 평가되는 ‘The Three Graces'(삼미신, 1947년 작)은 기하학적이기 보다는 원시예술적이었다. 19세기말 20세기초 많은 모더니스트들을 열광시켰던 아프리카의 토속 예술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The Three Graces'는 그러한 원시성을 매우 현대적으로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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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Exit 출구 없음


‘No Exit'(출구 없음, 1989년 작)은 ’근본적인 불안감과 도피 심리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그 작품이 불안해 보이지도, 어디로 도피하려는 심리도 엿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근본적인 고립감을 보여주는 듯 했다. ’출구 없음‘이란 갇혀 있다는 의미이고 계단 앞 두 개의 큰 나무공이 성적인 암시라면, 자발적 갇혀 있음에 더 가까워 보였다. 계단은 불안의 상징이나 은유가 되지 못하고 끊어진 계단의 높이와 병풍처럼 둘러쳐진 벽의 높이가 별로 차이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곳은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불안하거나 도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단 위로 올라가지 않기 위해 벽도 세우고 계단도 자른 것이다. 더구나 계단 아래에는 성적인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으니, 왜 그 곳에서 나가고 싶어 할까.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을 우아한 방식으로 극복해 내는 건강함의 양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아니면 내가 느끼는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과는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거나. ‘밀실’이라는 작품은 확실히 건축적이다. 그런데 표현 양식에서 ‘건축적’이라는 의미는 그 자체로 고전적 건강함을 의미한다. 역시 루이스 부르주아는 건강한 예술가이다. 이 점에서 그녀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가령 ‘부르주아는 무의식과 내면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욕망, 쾌락, 사랑과 고통, 소외와 고립 등의 경험을 표출하고자 했고 이는 주로 인체를 바탕으로 한 성적인 이미지나 에로틱하거나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일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과 삶의 안정성을 향해 가면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상처, 소외, 고독 등)을 견고한 형태(기하학적이거나 추상화된 양식) 속에 가두거나 욕망의 문제를 신비로운 생명이나 탄생과 결부 짓고, 끊임없이 역동적인 운동의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결국 부르주아는 20세기 초 고전적 양식의 모던 화법으로 포스트 모던한 주제들을 소화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후세의 예술사가나 비평가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녀의 작품이 우아해 보이긴 했지만, 열광적인 찬사를 보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는 그녀만큼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국제갤러리 신관은 국제갤러리 옆으로 나 있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있다. 네모반듯한 건물 앞의 공터가 있어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전은 무료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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