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루바이야트, 오마르 카이얌

지하련 2002. 11. 4. 00:05
루바이야트 - 10점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지음/민음사





The Rubaiyat of Omar Khayyam
E. Pitzgerald.
이상옥 옮김, 민음사 세계시인선 12







오, 지옥의 위협이여, 천국의 기약이여!
한 가지는 확실하오, 인생은 덧없는 것
이 한 가지 분명하고, 나머지는 거짓일세
제 아무리 고운 꽃도 지고 나면 그만이니
- 63편




19세기에 번역된 11세기, 또는 12세기 아랍의 시집. 그러고 보면 거의 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옛날, 같은 하늘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법한 곳의 시인의 시집이 후에 유럽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감동이나 열광을 생각을 해보면, 이 세계가 아무리 많이 변했다고들 하나, 이 인생들의 본질적인 영역의 변화는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들이 옛 것과 비교해 가치 있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현대인들의 대부분이 지옥도 천국도 없다고 믿는 이유는, 적어도 학교에서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고작 몇 백년 밖에 되지 않은 서양 근대의 산물이며 그렇게 생각해야만 명석 판명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지옥이나 천국이 없다고 합리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논증불가능하기 때문에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 어찌 알겠는가.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을지.

하지만 지옥이 있든 천국이 있든, 11세기 아랍 사람이나 21세기 동아시아사람이나 한결같이 인생은 덧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슬프다, 장미꽃 시들면 이 봄도 사라지고
젊음의 향내 짙은 책장도 덮어야지!
나뭇가지 속에서 고이 울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갔나
- 96편 



인생은 참 덧없다. 청춘은 한순간이고 시간이 지나고 얼굴의 주름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공포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생각하는 나 속으로 무너져 내린다. 슬프다. 대학 시절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던 이들은 이 도시 어느 구석진 곳에서 세상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나타나 도시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젊음의 향내는 책 속에서 잠들어있고 해마다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허무주의란 그렇게 특별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 세상이야 원래 허무했던 것이고 인생사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었고 생의 가치라든가 인생의 의미라든가 하는 것도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듯하다.

영원한 건 없고 사랑은 언제나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사라진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두고 연구논문이나 책들을 펴내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배운 것일까. 이 시집을 읽고서.


생사의 갈림이야 수학으로 풀어보고
인간의 영고성쇠(영고성쇠) 논리로써 따지거니
헤아려 보고자 한 모든 것 중에서도
깊은 이치 터득한 건 술의 묘미뿐이로다
- 56편 



이제 남은 건 술뿐이구나.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고 가슴 아팠던 어제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은 맘을 놓고 즐겨야겠구나. 아, 텅 빈 주머니가 초라하게 하지만, 그런들 어떠리오.


죽음의 술잔 든 저승의 천사
강가에 앉아 있는 그대 찾아와
그대의 영혼에게 잔을 권하면
사양 말고 들이키오, 그 한잔 술을
- 43편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이 가르쳐주는 방법. 생의 허무를 긍정하고 그것을 위해 한 잔 술을 들이키는 것. 희망이니 가치니 의미니 하는,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잠시 손 끝에서 놓고 그 빈 손으로 술잔을 쥐고 춤을 추며... ...


천국이 별것인가, 욕망 충족의 환영이요
지옥이 별것인가, 어둠 속에 던져진
불붙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 우리 모두
그 어둠에서 나와 다시 거기로 돌아갈 몸
- 67편 



덧없이 흘러가는 사랑을 잡으며 흘러갈 사랑을 노래하자.


남몰래 속삭이며 대답하는 술잔이여
그대 또한 한때는 살아서 마셨으리
고분고분 입맞춤을 받아주는 입술이여
얼마나 많은 입맞춤 주고 또한 받았는가.
- 36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