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봄비에 잠긴 이태원

지하련 2003. 2. 22. 16:38

   요즘 있는 사무실 창을 내다 보면 역삼동 라마다르네상스호텔이 한 눈에 들어온다. 호텔 앞 사거리가 다 보이고. 비가 내린다. 잔뜩 슬픈 물기 먹은 표정을 짓고는, 이건 봄비야, 라고 하얀 벽을 향해 지껄여댄다. 어젠 장충동 소피텔 엠버서더 호텔 1층에 있는 그랑-아라는 바에서 술을 마셨다. 아시는 분의 단골 술집인데, 혼자 와서 술을 마시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에도 필리핀 밴드가 와서 노래를 부른다.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 키가 작은 여자 두 명 중 한 명은 앙큼하게 생겼고 한 명은 순하게 생겼다. 순하게 생긴 아이가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앙큼하게 생긴 아이보다 몸매도 낫다.

   필리핀에 가면 일본이나 한국으로 노래부르러, 춤을 추러, 몸을 팔러 나올려는 여자아이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결혼한 여자도 있고 결혼하지 않는 여자도 있고, ... 이렇게 나온 아이들 중 몇 명은 국제결혼에 성공하기도 한다.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얼굴도 이쁘니, 인기야 당연히 높지 않겠는가.

   이 곳에서 술을 마신 후, 이태원으로 갔다. 이태원 어느 골목길 구석진 곳에 있는 바. 반 이상이 외국인들이었고 나머지 반의 절반은 외국에서 살다온 것으로 한국 아이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직원들과 우리 일행(나를 포함 2명)이었다. 이태원으로 가자, 비가 많이 내렸다. 술에 취해 여기저기다 전화를 걸어댔다. 비가 오는 낯선 새벽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전화를 걸수록 쓸쓸해지고 슬퍼졌다. 받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아침에 연극배우 최종원씨 부부가 나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최종원이 TV에 맨처음 나오게 된 사연이, 글쎄, 아들 대학 등록금 때문이었다고 한다. 약간 웃겼고 약간 슬펐다. 내가 한사코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저게.

   봄비가 내린다. 서울은 봄이 미리 보낸 물 병정들에 휩싸여있다. 구천을 떠도는 슬픈 영혼들이 그 봄비를 맞고 땅 속으로, 지구 속으로 잠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