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텍사스 전기톱 학살 The Chainsaw Massacre

지하련 1998. 5. 4. 00:38
『텍사스 전기톱 학살 The Chainsaw Massacre』을 통해 본 97년의 한국




‘Asia plunging financial markets send shocks around the world’
이번 주 타임은 아시아의 주가 하락으로 시작된 세계적인 주가 폭락을 커버스토리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WTO체제 아래의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세계 경제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한국의 주가폭락과 환율 급등은 세계 경제의 변화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제 불안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정부의 무능한 경제정책 때문인가, 아니면 기업들의 과도한 설비 투자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의 낙후된 경제 구조 때문인가. 그리고, 이런 경제 상태와 무관하게 난장판을 보이는 정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무런 해답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의 상태를 영화로 옮긴다면, 혹시 토비 후퍼의 『텍스트 전기톱 학살』 비슷한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토비 후퍼의 『텍스트 전기톱 학살』이라는 영화는 1974년도에 제작된 그의 데뷔작인 동시에, 1970년대의 미국을 읽어낼 수 있는 하나의 정치적인 텍스트로 이해된다. 그것은 단돈 35만불의, 16미리 저예산 영화라는 것과 스플레터 무비Splatter Movie의 고전이라는 이 영화의 특성과 함께 매우 중요한 점일 것이다.

이 영화가 나온 것은 마샬 버먼이 ‘모든 것을 다시 가정으로’라고 지칭한 1970년대, 몇 명의 젊은이가 캠핑을 간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묘지가 파헤쳐진 장소를 지나쳐가면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다가, 여행을 하고 있는 다섯 명의 젊은이가 타고 가는 차에 낯선 이방인이 타고 지나감으로서 영화는 돌변한다. 그는 자신의 손을 칼로 그어 피를 내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리어 휠체어에 앉은 프랭크린의 팔목을 칼로 긋고는 차에서 쫓겨난다. 그러면서 감독은 여러 가지 종교적 상징들을 사용을 한다. 별점을 본다거나, 차에 묻어있는 피 자국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프랭크린의 대사 같은 것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종교적인 상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한 명씩 한 명씩 살해당하는 것도 어떤 신비한 힘이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전기톱이나 망치, 칼 같은 것들이며 지극히 사실적이다. 그러나, 이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스플레터 무비’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것일 것이다. 언제나 죽음에의 공포는 기묘하고 어둡고 무서운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그리는 죽음은 밝은 낮이나 혹은 밝은 전등 밑에서 이루어지며, 또한 전기톱이라는 기계문명의 산물로 죽음에의 공포가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두려워하기보다는 잔인하기 때문에 낯설어 하며, 공포스러워하기 보다는 역겨워 하며, 그러다가 웃기도 하는 묘한 감정의 엇갈림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이 묘한 감정의 엇갈림은 베트남전쟁을 패하고, 냉전이 천천히 사라져가며, 반전운동과 좌파 운동의 물결이 천천히 시들어 가는, 그래서 버먼의 말처럼 다시 가정으로 향하게 되는 미국 젊은이의 상태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영화에서의 살인마로 등장하는 인물은 한 명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며 가정이고, 또한 도살업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먹는다는 차이점을 제외한다면, 다른 가족과 다를 것이 없다. 즉, 여기에서 우리는 ‘가정’이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최근 페미니즘 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가정의 해체’라는 공식과 맞물려 읽히며, 1990년대 헐리웃 영화들의 대표적인 이슈인 ‘가정의 재건’이라는 것과도 연관되어 읽힌다. 또한 이 영화는 시종일관 로우 앵글의 롱쇼트와 돌발적인 크로즈업으로 이루어지면서, 어딘가 덜 다듬어진 듯한 화면으로 관객의 옆을 파고들면서, 관객을 살인마로 만들었다가, 다시 희생자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관객의 위치를 흔들고 있다.

이제 스플레터 무비는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나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같은 영화로 익숙해져 있지만, 토비 후퍼의 『텍스트 전기톱 학살』은 앞의 영화들과 달리 1970년대라는 미묘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메타포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아직까지 토비 후퍼의 이 영화를 보고 해석해내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9시 뉴스를 보자. 그러면, 반은 대선에 관한 이야기이며, 반은 경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명퇴를 당한 아버지와 자퇴를 한 특수목적고 아들과 함께 티브이 브라운관을 통해서 전국방방곡곡으로 메아리친다. 텍사스에서 건너온 전기톱을 가진 살인마는 여기에 서서 전기톱의 시동을 건다. 혼란스러운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를 거친 미국 사회를 향해 전기톱을 돌렸듯이, 혼란스러운 80년대를 거치고도 아직도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를 향해 텍사스에서 온 살인마는 전기톱에 시동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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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에 쓴 '현대사회와 영화'라는 강의 때 제출했던 리포트다. 새삼스럽다. 이 땐 이런 식으로 글을 썼다. (2006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