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예르벤퍼 숲 속 나무들의 낮은 속삭임

지하련 2007. 9. 10. 11:35



Face of Jean Sibelius (circa 1910) in cast stainless steel



예르벤퍼 숲 속 나무들의 낮은 속삭임
- 시벨리우스, 작품 75번 - 다섯 개의 피아노곡



조금의 미동(微動)도 없이 투명한 유리창 너머 우두커니 서, 사각의 방 안을 매섭게 노려보기를 몇 주째, 여름날의 대기는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다. 어디에서 저런 열기를 가지고 오는 것인지, 쉴 새 없이 내 육체를, 내 영혼을 끝없이 높은 여름 하늘의 노예로 만들며, 날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 끄트머리에 어색하게 튀어나온 동아시아의, 온대성 기후에서 아열대성 기후로 변해가는 작은 반도 가운데 위치한 거대 도시의 여름을 견디게 하는 것은 대륙의 반대편, 대지의 대부분이 산과 숲, 호수로 이루어진 나라 사람의 100년 전, 작은 피아노 음악들이었다.


빵과 버터를 위한 음악

언제부터였을까. ‘예술가’와 ‘경제적 궁핍’이 꼭 신이 맺어준 연인처럼 붙어 다니게 된 것은. 하긴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살아있는 동안 경제적 궁핍과 주위의 비난과 멸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결국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예술작품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 저 두 단어의 어울림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예술가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16세기 초반, 이탈리아 르네상스 고전주의 예술의 정점을 이룬 라파엘로는 예술적 명성만큼이나 경제적 부도 함께 가지고 있었으며, 바로크 음악의 거장 헨델은 죽은 후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 살아있을 때의 명성과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영국 여왕으로부터 매년 200파운드를 받기도 했다. 바그너의 경우에는, 그의 막대한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았다는 점이 늘 문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북유럽의 핀란드가 자랑하는 작곡가, 베토벤 이후 교향곡에 있어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도 방탕한 생활로 하던 젊은 시절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The Sibelius Monument 1961-67

오랫동안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19세기 후반 이후, 독립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시벨리우스는 경제적으로 대체로 평온하였다. 러시아의 일부였던 시절에도 연금을 받았던 시벨리우스는 핀란드가 독립된 이후에도 연금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의 많은 작곡가들이 낭만주의 특유의 정신적 방황이나 경제적 궁핍, 시대와의 불화를 겪은 것을 비교해 보더라도, 시벨리우스의 삶은 핀란드 독립을 향한 그의 정치적이고 민족주의적 열망을 제외한다면 그가 살았던 헬싱키 근교의 전원 휴양지 예르벤퍼의 풍경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런 그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유럽 전체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던 1914년 이후부터였다. 이 때 그는 경제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많은 수의 피아노 소품들을 작곡해 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교향곡들이나 ‘핀란디아Finlandia’, ‘타피올라Tapiola’ 같은 교향시에 대해선 잘 알지만, 그의 피아노곡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더구나 오직 경제적 목적을 위해서만 작곡된 짧은 피아노곡들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연주해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까. 하지만 이 곡들은 현재 시벨리우스의 숨겨진 인기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막 꽃을 피운 마가목, 쓸쓸한 소나무, 포플러나무, 자작나무, 전나무

차갑고 두툼한 대기가 마가목, 소나무, 포플러나무, 자작나무, 전나무들로 이루어진 깊은 숲 속을 지나치며, 북태평양의 습하고 뜨거운 공기들로 인한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앉아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듣고 있는 나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그 곳의 여름과는 전혀 다른, 난생 처음 보는 광경 앞에서 다소 놀라는 눈빛. 그들은 사뿐한 걸음걸이로 이제 막 꽃을 피운 마가목에게 가는 중이었다.

The Sibelius Monument 1961-67 (밑에서 본 모습)

시벨리우스의 작품 75번은 ‘마가목이 꽃을 피울 때’라는 곡으로 시작한다. 또박또박 끊어질 듯 이어지는 피아노 소리는 북구의 차가운 물방울이 낮게 떨어지며 내는 소리를 닮아있다. 꼭 나무들이 사람에게 다가와 오래된 숲 속의 비밀을 알려주려는 듯 조용하고 감미로운 소리로 다가오다가도,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시선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조심스러움이 물결치듯, 피아노 소리는 여름날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사각의 공간 여기저기를 메우며 흘러 다닌다. 다섯 개의 피아노 소품들로 이루어진 작품 75번, 짧게는 1분 45초, 길게는 3분 40초 정도의 피아노곡 다섯 개가 우리 귀를 감싸고도는 순간은 길어야 12분 30초 남짓. 하지만 우리는 그 곳에서 예르벤퍼 숲 속의, 지금 막 꽃망울을 터뜨린 마가목,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 북구의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는 포플러나무, 자작나무, 전나무와 만날 수 있다. 시벨리우스는 이렇게 다섯 개의 피아노곡마다 그 음악에 어울리는 나무들을 하나하나씩 짝 지워주었다.


경제적 목적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이 작은 피아노곡들은, 놀랍게도 시벨리우스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예술 전체가 핀란드의 신화와 자연에서 시작해, 그것을 노래하고 그리며 현대적 해석을 담아내었듯이, 이 피아노곡들은 핀란드 자연의 작고 사소한 존재들에게 몰입하며, 그것을 투영하고 속삭이듯 숲 속의 섬세한 움직임까지 그려낸다. 그래서 음악은 짧으나 매혹적이고, 조용하나 시원하고 얇게 언 살얼음이 숲 속 바람에 부서지는 모습을 닮아있다.

시디플레이어 안에 핀란드에서 녹음된 시벨리우스의 작은 피아노곡 시디를 넣어 플레이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순식간에, 태평양 북쪽 바다의 대기가 가지고 온 뜨거움은 북유럽 숲 속의 나무들이 작은 속삭임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며, 어느 새 내 주위를 북유럽의 시원한 공기들로 바꾸어 놓는다. 때로 작은 음악 하나가 계절의 불편함을 물러나게 하는 힘을 가지기도 하는 법이다. 

(2007년 9월 <숲>에 실린 글임)




[수입] Sibelius : Piano Music
Risto Lauriala/낙소스(NAXOS)

Jean Sibelius의 여러 피아노 소품들을 연주한 앨범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작품 85번의 다섯 개의 피아노 소품들의 이름들은 꽃 이름이다. Bellis, Oeillet, Iris, Aquileja, Campanula. Sibelius의 피아노 소품들은 매우 소박하고 친근하다.

[수입] 시벨리우스 : 교향곡 4-7번
Herbert Von Karajan/DG

품절이라니. 카라얀의 시벨리우스는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다. 시벨리우스의 저력은 교향곡과 교향시에 있으며, 카라얀은 이를 증명해낸다. 오프라인 교보 핫트랙에서 이 시디를 구입하였는데, 아직 재고가 남아있을 지는 의문이다.

[수입] 시벨리우스 : 바이올린 협주곡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연주/DG

이 앨범. 무척 듣고 싶은 앨범이다.